[향토문화]폭도의 소굴 지목..북촌리 학살터옴팡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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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폭도의 소굴 지목..북촌리 학살터옴팡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0.30 0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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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에 걸친 대학살을 낳게 한 예비 도화선 돼

 

북촌리 학살터옴팡밭
 

위치 ; 조천읍 북촌리 북촌초등학교 서쪽 200여m 지점 소나무가 있는 빌레 동쪽 밭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학살 터

▲ 북촌리_옴팡밭순이삼촌문학비
▲ 북촌리_옴팡밭

1948년 6월 16일(음 5월 9일)은 보리 수확이 한창인 때였다. 우도에 근무하던 순경 두 가족 13명은 제주항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제주시로 향하던 이들을 태운 배가 북촌 앞 바다를 지날 무렵 때마침 갈바람이 몰아쳐서 순항하지 못하고 서우봉의 선반코지 못미처 뱃머리를 북촌포구로 돌렸다.

이들이 북촌포구에 기항하게 된 때는 초여름의 늦은 오후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사이에 정박중인 선박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름 아닌 무장대(당시 표현으로는 폭도)들이 침입하여 선장을 포함한 모든 승객들을 포박해 놓고 순경 두 사람을 어디론가 끌고 가버린 것이다.

날이 밝자 마을 주민을 모두 동원하여 이들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이틀 동안을 바다로 들로 찾아 나섰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동네는 온통 난리법석이었다. 모든 선박과 해녀들은 온 바다를 뒤져 다녔고, 남자들과 군경들은 야산으로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이 같은 일이 발생한지 3일째 되는 날 늦은 아침이다. 조천지서(지금의 연북정) 앞 바다에 사체 한 구가 떠올랐다. 사체는 북촌포구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순경임이 틀림없었다.

발목에 돌덩이를 매달고 바닷물 속으로 던져 넣은 것이다. 이 분이 바로 북촌 선창에서 피습을 당한 우도지서장 '양태수 경감'임이 가족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한편, 인천이 고향인 진순경은 산으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이 분의 생사는 뒤늦게 고 윤공삼씨의 신고로 알려지게 되었다.

진순경의 시체는 통물 근처(높은물 아래) 구렁텅이에 돌로 덮여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분들의 사인이 규명되기까지 사우니물과 도와치물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진상을 밝히라는 문초에 시달려 애꿎은 고초를 수없이 겪어야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북촌마을은 폭도의 소굴로 지목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은 두 차례에 걸친 대학살을 낳게 한 예비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북촌사람들의 집단 희생은 제주도민이 겪은 어느 마을, 어느 집단의 사건, 양상과는 달리 우리 군부대원들에 의하여 마을이 전소되고, 480명에 달하는 대규모 집단이 희생된 비참한 사건이다.

집단 희생은 1948년 11월 16일과 한 달 후인 1948년 12월 19일(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전자는 남로당과 연루되어 1948년 5월 10일 국민 총선거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마을의 젊은이 24명이 희생을 당한 것이며, 후자는 무장대가 세화에서 함덕리로 향하던 군인 이송차량에 기습을 가하여 군인 2명의 목숨을 잃는 사건에서 보복학살이 감행된 것이었다.


1948년 음력 11월 16일(목) 아침, 진압군들의 출두명령에 의하여 젊은이 40여 명은 이웃 마을 함덕국민학교(함덕해수욕장 남쪽. 현재 대명리조트의 서쪽)에 주둔하는 군인(2연대) 본부에 집결하였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군부대에 출두한 북촌의 젊은이 40여 명 중 나이가 많은 16명은 사안과 무관하다 하여 귀가 조치하였으며, 나머지 24명은 하루 동안 부대 내에 감금하였다가 그 다음 날 저녁 4시경 북촌리와 동복리의 읍경계인 '난시빌레왙'(한길 위쪽 호텔이 있는 곳)에서 전원을 사살하였다.

이유는 1948년 5월 10일 국민총선거에 불참한 것을 빌미로, '이는 분명 북한의 남로당에 연루되어 있다' 하여 자행한 살인행위였다.


이 중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온 이상영(이한진의 부친)씨는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으나, 시체를 찾으러 나선 가족들에 의하여 소생하였다. 하지만 총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7년 후에 돌아가셨다.


이 시기는 무장대가 깊은 밤을 틈타서 마을에 침입하여 젊은 사람들을 산으로 끌어가거나 먹을 것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사건은 음력 1948년 12월 19일(월)에 일어났다. 전날 밤에도 여느 때처럼 학교 교문 앞의 보초막에서는 산사람들의 잠입을 경비하는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겨울 새벽에 서쪽으로 향하는 자동차 소리와 시간을 같이하여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려왔으며. 곧이어 지금의 북촌초등학교에서 서쪽 100여m 지점(속칭 마가리질 서녘의 오르막 길)에서는 교전이 벌어진 듯한 수십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이 날 새벽에는 세화리에서 중대 일부 병력을 함덕리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 3대대 본부로 이송하던 중에 산사람들에 의하여 2명의 군인이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군인들은 산 쪽으로 도주하는 무장대를 추격하였으나 검거하는 데 실패했으며, 인근 숲 속에서는 무장대가 잠입했을 법한 곳에서 맹탱이(볏짚 새끼로 엮어 만든 가방) 속 밥차롱(대나무로 만든 도시락)과 숟가락 6개, 바지 한 벌이 들어있는 흔적을 발견하였다.


군인들은 주변에서 밥지은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봐서 이는 분명 북촌마을에서 식사를 제공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마을로 방향을 바꿔 무장대의 잠적이 의심되는 곳을 수색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문초하고 학교로 내몰며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보초를 섰던 섯동네 노인 9명에게 군인들이 이송하는 기밀을 폭도들에게 알렸다는 누명을 씌워 보초의 책임을 물었으며, 군인 사체를 부대로 운구하여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마을사람들을 몰살하겠다는 언질을 남겼다.


이 사실을 가족에게 전한 황학선 씨를 포함한 9명은 군인의 시체를 부대에 운구해 갔는데, 이들은 구 함덕중고등학교 정문 안의 오른쪽 모퉁이로 끌려가서 무지막지한 매질로 실신 당한 후 사살되었다.

이 8명의 행방은 1948년 12월 19일 죽음의 현장에서 경찰 가족임이 확인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다음 날 귀가한 이군찬 씨의 증언으로 행방을 알게 되었다.

심한 구타를 당하고 죽음의 형장에서 총격을 가하기 바로 직전에 이군찬 씨는 손을 번쩍 들며, 이유 없는 죽음 앞에 마지막 한마디를 호소하였다.


"잠깐, 총격을 멈추시오! 경찰가족도 죽어야 합니까?"
"순경이 누구요?"
"삼양지서에 이성익 순경이 저희 샛아들입니다."
이렇게 이군찬 씨는 열외되었으며, 나머지 8명은 운명을 달리하였다.


한달 간격으로 두 차례의 사건을 겪은 북촌마을은 무려 479명의 무고한 희생과 온 마을이 불에 타는 처참한 사태에 직면하였다.(제주도 4·3 피해 보고서, 1997.1.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1948년 11월 16일(음)에는 청년 23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한 달 후인 12월 19일에는 무장대의 기습에 의한 군인 2명의 죽음에 따른 보복으로 수많은 희생을 치르는 끔찍한 사태로 번져나갔다.

군인들은 사전에 마을을 포진하고 무장대나 젊은이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였으며, 젊은이나 폭도를 내놓으라고 위협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학교로 내몰았다.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갔어? 너희들이 기르는 폭도를 잡아오지 않으면 다 죽인다."
하며 무장대와 젊은이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하여 갔으며, 넋을 잃고 빈손으로 학교에 운집한 마을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 공포에 떨고 있었다. 학교주변에는 너븐숭이부터 학교 앞 산신동산과 정지퐁낭 일대에 이미 1,2백 여명의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운집한 마을사람들을 포위한 채, 기관총을 3각으로 장전하여 도주를 미연에 차단하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은 마을의 몇몇 사람(김석도 씨 외)을 군중 앞에 대면시켜놓고 죽일 가족과 살릴 가족으로 가르도록 협박하였다.

군경 가족과 민보단 가족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폭도 가족과 도피자 가족, 폭도에게 도움을 주는 자, 산에 올랐던 자로 간주하여 두 그룹으로 나눠 앉혀놓고 무조건 형장으로 끌고 나갔다.

이에 앞서 민보단 단장이었던 장윤관 씨에게는
'민보단 운영을 이따위로 하니까 폭도를 양산시켰다'
며 팬티 차림으로 운동장을 뛰게 하고는 두 바퀴쯤 돌 무렵 두 세 차례 사격을 가하여 마을 사람들 앞에서 본보기 총살을 하였다.

운집한 모든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죽임을 목격하고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감시하는 눈을 피하여 살릴 그룹으로 피신하던 문인섭씨 모친과 조씨의 부인에게도 총격을 가하여 사태의 심각성을 암시하였다.

이들의 죽음이 북촌학교 운동장에서의 첫 사살 행위이다. 이들의 시신은 가족에 의하여 거둬졌으나 연고자가 없는 하인 조씨의 시신은 학교 서쪽 울타리 밖인 뒤끔밭(옴팡밭)으로 던져졌다.


계속해서 죽일 자와 그렇지 않을 자로 구분하여 집결시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교문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죽음의 집단에서 살 수 있다는 무리 쪽으로 몰래 앉은걸음하던 한 아기엄마가 총에 맞아 뒹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고 한경림씨의 어머니였다. 아기(고 한경림)를 안은 채, 한 어머니가 총에 맞아 아기와 함께 엎치락뒤치락 꿈틀대며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싸늘하게 숨이 멎은 어머니의 몸에는 피에 젖은 홑적삼 사이로 젖가슴이 드러나 있었고, 배고파 울던 아기는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고 있었다.

죽음 앞에 떨며 서있던 사람들은 애처로운 심경으로 바라다볼 뿐 그 어느 누구도 젖가슴에 매달려 젖을 빠는 아기를 떼어놓거나 어머니의 부릅뜬 두 눈을 가리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군경가족과 민보단가족, 동짓달 열 엿새 날에 죽은 23명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신작로 인근 당팟(취락구조의 정지폭낭 아래쪽에 있는 김진국 씨 소유의 밭)과 탯질(너븐숭이 바다 쪽의 박부남씨 소유의 밭)로 끌고 가서 무참하게 몰살시켰다. 이 두 곳에서의 희생자가 제일 많았다고 한다.


사살이 계속 진행되고 있을 오후 4시경에는 뒤늦게 나타난 상급 지휘관의 '사살중지!' 명령으로 광란의 사살행위는 일단 멈추었으나, 이어서 지휘관은 살아있는 북촌사람들을 모아놓고 몸서리치는 언질을 남겼다.


"오늘 새벽에 피살된 군인 1명당 너희들 500백 명씩을 죽였어야 할 것이다. 오늘 죽은 사람들은 백 번 죽어 마땅한 자이나, 그 중에는 착한 이도 있을 것이다. 차후에 폭도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내통하는 자가 있을 시는 그 땐 모두를 몰살하여 씨를 말릴 것이다."
라고 엄중한 말을 남기고 군인들을 철수시켰다.


이어서 앞다투어 식구들의 시체를 찾아 나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들을 목격하였다. 형장(탯질 밭)에 쓰러져 죽어있는 모습이 마치 무를 뽑아 놓은 형체처럼 즐비하게 널려있어서 누가 누구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총성이 멎은 해 저문 들녘에는 형제 자매를 찾는 울부짖음이 동지섣달의 차가운 밤 기운도 잠재우지 못하였다.

아비규환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비명에 숨져간 형제들을 밤새 찾아 헤맸으며, 살을 에는 듯한 한겨울의 추위와 긴긴밤의 허기진 고통도 잊은 채 죽은 부모 형제를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워야만 하였다.


죽은 자의 수가 워낙 많아서 시체는 아녀자들에 의하여 가매장되었다가 사태가 진정된 후에 안장하였고, 그 중에도 온 가족이 몰살당한 사람들의 시체는 눈이 덮인 채 얼마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하여 야산에 묻혔다.

이 날에 죽임을 당한 이들의 관이나 호상옷을 마련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호강의 소리였고, 하나같이 피묻은 옷이 그대로인 채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더구나 사태가 일었던 다음 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함덕마을로 집결시켜 문초를 계속하였다. 군인들은 그 중에서도 젊은이나 수상쩍은 이들이 혹시 살아있나 싶어 경계와 감시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이밖에도 이웃마을과 북촌사람의 몇몇을 내세워서는 불순한 사람을 색출하도록 하는 강압을 서슴지 않았으며, 뽑혀나간 사람들을 들로 끌고 가거나 그 앞에서 총살을 자행하였다.


그 이후로 가족과 집을 잃은 북촌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나마 친척이 있거나, 친분을 찾아서 이웃마을 함덕리 등지로 찾아간 사람들은 마굿간이나 헛간에서 추위와 기아를 견디며 목숨을 연명할 수가 있었다.

반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은 동냥질로 동지섣달의 매서운 추위와 참기 힘든 기아에 허덕이며 인간 이하의 비참한 생활을 보내야만 하였다.


함덕 마을로 이주해온 후에도 군인들은 '젊은이와 폭도'를 찾는 일에 조금도 고삐를 늦추지 않아 북촌사람들에게 가하는 강압은 더욱 거세어져갔다.

밤이면 밤마다 불현듯 나타나서 창검을 들이대며 산사람과 내통하고 있지를 않나 감시를 하고, 한밤중이면 잠자리를 걷어차며 '폭도와 젊은이'들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협박과 공포의 밤을 하루도 거르지 않아 죽음에 못지 않은 두려움의 도가니로 몰아세웠다.(북촌리 출신 황요범씨 글 참조)


당시 북촌 인구는 1864명이었는데 일본이나 산으로 피신한 사람이 400명 정도 되었기 때문에 마을에 살고 있던 사람은 대략 1400명 정도였다. 마을 인구의 40%정도가 12월 19, 20일 단 이틀 동안에 학살된 것이다.


함덕리가 고향이며 경찰에서 운전을 했던 김병석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게 마을 사람을 다 죽이려 했던 이유는 이미 집들을 다 불태워 버린 상태에서 그들을 수용할 대책이 없어서였으며, 박격포를 이용하여 한꺼번에 죽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일일이 총살한 것은 군인 개개인에게 총으로 사살하는 경험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414∼415쪽, 제민일보 2002년 6월 1일)


다음은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북촌리 이□□ 아주머니의 증언이다.


"여자들은 치마 걸칠 사이도 없이 운동장 마당으로 내몰리니 허겁지벅 가다가 신작로 쯤에서 뒤돌아보니 벌써 집엔 불타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습니다. 동쪽에서부터 내몰리니 운동장에 가서도 마을 동쪽 사람들이 앞엣줄에 앉게 되고 죽기도 많이 죽었습니다.

눈이 펑펑 오고 있었는데 우리 친구 아버지는 '손이 허영해부난 산에 간 폭도허단 왔다'고 운동장을 몇 번 다 돌리고, 민보단장은 가자마자 곧 모범을 보인다고 '돌아서!' 하고는 팡 쏘니까 금방 죽지를 못하여 몸이 카들락카들락 합디다.

그러니 다시 팡팡 쏘아대고. 우리 아버지도 그 총에 맞았지요. 그러는 중에 함덕에서 급히 말 타고 달려오는 군인 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밍크오바 닮은 털이 복삭한 옷에 가죽모자에 가죽구두를 신은 뚱뚱한 군인 네 명이 '중지, 중지!' 외치며 오더군요. 내가 열네 살 때입니다."(전교조 제주지부 역사기행 자료 1994)


마굿간과 돼지우리에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불에 타죽은 가축들의 시체가 남아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그나마 천운의 생을 타고 살아남은 자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도 혹한 속의 배고픔도 감수해야만 하였으며, 폐허화된 마을을 복구하며 생을 유지하는 것도 오로지 이들의 몫이었다.


세인들은 북촌마을을 이름하여 '폭도마을, 빨갱이마을'이라 누명 지었으며, 살아 남은 자들의 자녀를 일컬어 '폭도새끼, 빨갱이새끼'라 손가락질하였다.

사태를 겪고 살아남은 남자들이란 몇몇 노인들이었으며, 그 수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한 동네에서도 한 두 명에 불과하였다.

장례를 치르고, 잿더미를 걷어내어 초막살이를 마련하는 것만도 5,6년이 더 걸렸으며. 이것마저 복구의 밑천이 여자들의 힘으로 이뤄졌다하여 북촌마을을 일명 '여자마을'이라고 부른다.(북촌리 출신 황요범씨 글 참조)

바로 서쪽 빌레 옆에는 당시 희생된 어린이들의 무덤이 있으며 옴팡밭에는 현기영의 '순이삼촌' 문학비가 설치되었다. 밭의 동쪽에는 조그만 잔디밭이 있다.

전에는 약간 볼록하게 봉분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거의 납작하게 내려앉았다. 이것은 연고자가 없어 그 자리에 흙을 덮은 채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당시 8세였던 김성국이라는 어린이의 무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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