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松竹梅 結義兄弟..조천리 김명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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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松竹梅 結義兄弟..조천리 김명식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0.31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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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적 반제국주의 단체인 비밀결사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 만들어

조천리 김명식묘

김명식의 묘 金明植墓
위치 ; 조천읍 조천리 남쪽 중산간 조천공동묘지의 서쪽 김해김씨 문중묘역 북서쪽
유형 ; 무덤
시대 ; 일본강점기
서훈 ;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 조천리_김명식묘
▲ 김명식

松山 金明植은 명문가인 전 정의현감 김문주(金汶株)의 4남으로 조천에서 태어났다.

1910년 나라를 잃자 비분강개하여 고순흠(1893~1977) 홍두표(洪斗杓 1891~1917)와 함께 국권회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松竹梅 結義兄弟를 맺었다.

그래서 그들의 호를 김명식은 松山, 고순흠은 竹岩, 홍두표는 梅園이라 하였다. 그들은 일찍이 조국 해방을 위해 신학문을 배우겠다는 결의로 유학길에 올랐는데 김명식은 1915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와세다대학에는 장덕수, 신익희, 양원모, 최팔용 등의 유학생들이 재학중이었고, 김명식도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의식을 폭을 확대시켜갔다.

그 과정에서 김명식은 1916년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인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간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학우회의 간부로서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에 몇 편의 시와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고, 신입생을 대상으로 애국을 주제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해공 신익희 등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면서 항일운동에 나섰으며, 1916년 봄 동경에서 아시아 지역의 피압박 국가 청년들(조선, 중국, 대만의 청년들 40여명)로 구성된 국제주의적 반제국주의 단체인 비밀결사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만들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서로 도울 것과 민족평등, 국제평등을 실현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한국인으로는 김명식을 비롯하여 장덕수․김철수․정노식․윤현진․김효석 등 10여명이 참석했고, 그 뒤 신아동맹단은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공산주의 조직인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1920)으로 개편되면서 창립 멤버가 되었다.


김명식은 1918년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한 후 1919년 2․8독립선언에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국한 김명식은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의 창간과 함께 논설기자로 참여하여 〈父老에게 告하노라〉〈大勢와 改造〉등 민족의 각성과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한국 최초의 노농(勞農)단체로서 1920년 4월 창립된〈조선노동공제회〉발기인의 한 사람이다. 1921년에는 노동공제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김명식은 뛰어난 웅변으로 대중단체의 강연회를 통해 신사상을 소개하고 신사회 건설을 역설하였다. 또한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 <동아일보> 등의 지상에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다수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 가운데 1921년 6월 3일부터 8월 31일까지 6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연재물은 한국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레닌의 일대기로 일반인들이 레닌과 러시아혁명을 이해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http://marupress.egloos.com/3115504)


그리고 사회혁명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상하이파는 민족주의 세력과의 광범위한 연대를 꾀하는 통일전선 노선을 걷다가, 1922년 동아일보 사장 김윤식의 사망을 계기로 김윤식 사회장을 추진한 장덕수의 우파와 이를 반대한 김명식, 유진희의 좌파로 분리되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명식은 상하이파 좌파를 이끌고 기독교 청년 세력과 합작하여 신생활사를 설립하고, 1922년 1월에 박희도․김사민 등과 혁명 사상의 대중화를 위한사회주의 대중잡지 《신생활》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사장은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박희도가 맡았고, 김명식은 주필이 되었다.(위키백과) 애국의 정열과 북받치는 울분을 이 책에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년 11월에 《신생활》에 〈노서아혁명기념호〉에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을 찬양하는 글을 출간한 것이 트집이 되어 일본 관헌에 구속되고
1922년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린 조선 초유의 사회주의재판. 피고는 신생활사의 박희도, 김명식, 신일용, 유진희와 조선노동대회의 김사민, 이항발 등 6인이었다.

이들은 1922년 11월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로 발행된 󰡔신생활󰡕 11호에 게재된 김명식의 「로서아혁명 오주년 기념」, 신일용의 「오년전의 금일을 회고」, 유진희의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 이항발의 「자유노동조합 결성의 취지」 등의 글이 ‘적화사상’을 선전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이 날 공판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이 재판에서 “공산주의에 찬성하는가?”라는 노무라 재판장의 질문에 김명식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명하며 연구하고 찬성하오”라고 당당히 답하였다고 한다.


1923년 1월에 制令違反으로 2년형이 언도되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 때 고문과 수감 생활로 건강을 상한 그는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나 출옥 후에도 공제회(共濟會), 신간회(新幹會) 일에 관여하면서 예리한 필봉으로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1927년 좌우합작으로 결성된 민족운동 단체 신간회의 제주지회장을 맡았으며 1930년에는 오사카 시에서 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한 혐의로 수감된 바 있다.


와세다대학에 함께 다녔던 김명식과 이광수의 논쟁은 유명하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1922)에서 '노동자의 파업과 반란을 낳아 위기로 치닫는 서구의 자유주의·개인주의·무정부주의적 경향'을 질타하고, '이기적이고 나태한 겁쟁이'인 조선 민중이 엘리트 지도자에 의해 집단에의 봉사정신을 익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조선 민중이, <우덕송>(牛德頌, 1925)에서 이야기한 '무거운 멍에를 지고 밭을 갈았다가 나중에 인간에게 살과 피, 가죽을 주면서 죽는 성인(聖人)과 같은 소'와 같이 지배자들을 위해서 살고 죽는 우민(愚民)이 되어야 함을 비유적으로 주장했다.

'강력한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중이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지도자론>(1931)은 공산주의 이론가 김명식에게서 비판의 화살을 맞는다. 김명식의 이광수의 비판(<삼천리>, 1931년 9월) 논리는 참으로 명쾌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민족 전체를 계몽·지도하겠다"는 사람은 결국 지배자를 위해 절대 다수의 이익을 짓밟을 텐데 그건 계몽·지도가 아니라 지배다. 피지배자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관심도 없이 자본가 위주로 만들어진 '민족'의 미래를 들먹인다면 극히 폭력적인 지배 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에 이광수가 반박문을 쓰고 흥분했지만 몇 개월 뒤 김명식의 비판 제2탄('영웅주의와 파시즘', <동광>, 1932년 3월)이 날아와 이광수의 정체가 더 확실히 드러난다.

이광수는 힘이 바로 정의라며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친 초강력의 집단의 힘을 찬양했지만, 김명식은 역사적 진보의 논리를 따르는 힘만이 정당할 수 있으며 해방을 구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인권·자유를 짓밟는 힘은 반역사적 폭력일 뿐이라 못박았다.

또한 유럽·일본, 조선의 부르주아들까지도 피지배민의 해방 투쟁에 맞서 폭력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적 위기가 닥쳐왔음을 보여준다는 것이 김명식의 논리였다.


이광수가 숭배한 이순신에 대해 과연 거북선 제조가 이순신의 천재성 덕분일까, 당대 조선의 기술적 수준의 반영이 아니었을까라고 김명식은 반문했다. 수많은 조선 기술자와 병졸, 의병에 가담한 농민·노비 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명식은 "이순신이 나타나지 않아 조선이 일본이나 명나라의 지배에 들어갔다 치자. 그렇다고 피착취 민중의 형편이 조선왕조가 지배할 때보다 크게 나빠졌을까"라고 되묻기도 한다. 김명식은 "경주의 화려함을 볼 때 신라 노예들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생각해보라"고도 했다.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자 1940년 4월 1일부터 10일까지 7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제1차세계대전후의 세계사》라는 논설에서 〈천국은 회개하는 자의 연재〉라는 글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초대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으로 국권회복에 크게 기여한 선각자이며 제주3걸(고순흠․김문준․김명식)로 꼽힐 만큼 그 명성이 높았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 논설기자로 그가 쓴 ‘대세와 개조’(1920. 4. 1.)와 7차에 걸쳐 연재한 ‘제1차 세계대전후 세계사’(1941. 4. 1.~10.)는 유명하다.


제주도 최초의 사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노동공제회 제2대 회장(1921)을 지내고 [신생활]지 필화 사건으로 2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제주는 물론 전국의 청년들에게 커다란 사상적 영향을 끼쳤다. 1922년 1월 22일 이 필화사건으로 관련자들에 대한 언도 공판이 내려질 때 김명식은 일본인 재판장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천만 우리 동포 중에서 마음 속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라는 망해도 민족의 혈맥은 절대로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혼과 정기를 살리기 위해 언론인인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1923년 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신생활사 필화사건으로 징역 2년을 언도 받은 김명식은 그 해 4월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다. 형무소에서의 가혹한 노역과 말라리아에 의한 늑막염과 폐병의 발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김명식은 7월 26일 형 집행정지로 출옥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얻은 병의 후유증으로 김명식은 청각을 잃고 오른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출옥 후 서울의 각 병원을 전전했으나 계속되는 건강악화로 인해 사회활동을 전면 중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가세는 극빈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었다.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김명식은 1924년 11월 생활고와 병마와 싸우는 자신의 심정을 술회한 「병상영(病床咏)」과 「빈민한(貧民恨)」이라는 두 편의 한시를 󰡔동아일보󰡕지상에 발표하였다.

이후 투병생활의 와중에서도 󰡔개벽󰡕과 󰡔조선지광󰡕에 당대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몇 편의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건강의 악화로 인해 김명식은 1928년 3월 병의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이 밀집한 오사까에 정착한 그는 병 치료와 함께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에 대한 지도를 병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1930년 6월 17일 다시 검거되어 오사까형무소에서 신생활사 필화사건의 잔여 형기를 복역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인해 다시 석방되어 치료를 받는 등 계속되는 병마와의 투쟁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931년부터 향리인 제주로 낙향하는 1940년까지 김명식은 오사까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악화된 건상상태와 계속되는 일제의 회유와 압력 속에서도 송봉우가 주재하던 <비판>, 김동환이 주재하던 <삼천리>, 동아일보사의 <신동아>․<동아일보>, 조선일보사의 <조광>․ <조선일보> 등의 지상에 당대 사회운동, 민족문제, 국제정세, 정치론 등에 대해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의 견해를 밝힌 60여 편의 논쟁적인 글들을 기고하였다. 또한 1936년에는 삼천리사에서 자신의 정치론과 국제정세관을 집약한 <독재정치와 의회정치>라는 책을 출간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http://marupress.egloos.com/3115504)


1936년 김문준이 사망했을 때에는 명문장이라고 일컬어지는 ‘木牛에 哭함’이라는 弔文을 쓰기도 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체포된 김명식은 독립정신의 화신인 것처럼 한치도 굴복함이 없이 옥중투쟁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참다 못한 일제 관헌은 그의 손목을 짓이기고 혀까지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글을 쓸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함흥형무소를 출감한 것은 1941년 가을이었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1982. 94쪽)


일단 고향에 돌아온 그는 치료를 위하여 오사카에 갔으나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신체적 고통과 불우한 생활이 이어져 구좌면 세화리 그의 사위 오군표의 간호를 받으며 1943년 4월 50세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더라도 일본이 망할 때까지는 사망신고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濟州鄕校誌 635~636쪽)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그 후에 사망신고를 하였다.


그는 제주도 사상운동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동아일보〉를 모체로 하는 민족주의운동과는 다른 방향에서 활동했다. 그 후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운동의 초창기에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도의 사상운동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매우 크다.(http://culture.jeju.go.kr/)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전향하여 《동양지광》과 《조광》을 통해 다수의 친일 평론을 발표하였다. 1943년 3월에는 《삼천리》에 '氏制度 創設과 朝滿一如‘라는 글에서 창씨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지금까지 해 온 그의 업적을 고려할 때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부문에 선정되었으나 보류되었다.
《작성 060521, 보완 120404, 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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