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증주벽립 새겨..조천리 채동건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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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증주벽립 새겨..조천리 채동건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1.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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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듯이, 증자·주자를 존경하고 따르라.’

조천리 채동건선정비
 

使相蔡公東健恤民善政碑
조천리 비석거리 선정비들이 1976년 9월에 제주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 조천읍 조천리 비석거리
시대 ; 조선시대 후기(1858년)
유형 ; 碣(선정비)
규격 ; 석재는 위쪽에 약간 붉은 색을 띠는 현무암이며 높이 61㎝, 너비 29㎝, 두께 17㎝이다.

▲ 채동건선정비_뒷면
▲ 조천리_채동건선정비

현무암 비각 속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전면에는 〈使相蔡公東健恤民善政碑〉라는 글씨뿐이고, 뒷면에는 〈戊午四月 日〉라고 하여 건립년대를 표시하였다.


채동건은 조선 후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이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순녀(順汝). 아버지는 포도대장 채학승(蔡學承)이다. 생몰년 ; 1809~1880. 제주목사 재임기간은 1855~1857년이다. 선정비는 그가 이임한 다음해인 무오년(1858) 4월에 세웠다.


음보(蔭補,음서)로 무관직에 기용되어 내외 관직을 거쳤다. 철종6년(1855) 8월 목인배(睦仁培)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철종7년(1856) 봄에 귤림서원(橘林書院) 모현암(慕賢岩) 편액을 썼고, 제주성 동성문(東城門)에 있는 연상루(延祥樓)를 중수하였다.


제주시 이도1동의 오현단 서쪽 벼랑, 속칭 병풍바위에 있는 글씨 ‘증주벽립(曾朱壁立)]’은 1856년 제주목사 채동건과 제주판관 홍경섭(洪敬燮)이 새겨 넣은 글자이다.

증주벽립(曾朱壁立)은 원래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 북쪽 벼랑에 새겨진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다.

제주 출신의 변성우(邊聖遇)[1721~1787]가 성균관직강으로 있을 때 송시열의 글씨를 모사, 보관하고 있었는데, 송시열을 기리는 뜻에서 채동건과 홍경섭이 음각으로 새겨 넣은 것이다.

그 의미는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듯이, 증자·주자를 존경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글자의 크기는 가로 50㎝, 세로 60㎝이다.


철종8년(1857) 6월에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제주를 떠났다. 1862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고종3년(1866) 개성부안무사(開城府按撫使)가 되어 요처를 방비하였고, 1869년 평안도병마절도사 재임 중 자성·후창 두 고을을 신설하고, 포수를 모아 변방을 수비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듬해 장계를 올려 장위병(壯衛兵)에게 친위병(親衛兵)과 같은 혜택을 줄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고종8년(1871)에는 새로 설치한 변방의 고을인 자성(慈城)과 후창(厚昌)의 포수(砲手)들을 해당 고을에서 시험을 보게 한 후에 1등한 사람을 강계방어영(江界防禦營)의 도시(都試)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해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한때 진산군에 유배되었고, 1873년에는 목화농사가 흉년이었기 때문에 고성부에서 바치는 군포를 돈으로 대납하게 할 수 있도록 상소하였다. 고종13년(1876) 형조판서에 올랐다.


그가 떠난 지 3년이 지난 1860년2월 제주 암행어사 심동신(沈東臣)이 제주의 민정을 규찰하고 중앙 정부에 보고서를 올린 내용을 보면 前제주목사 채동건(蔡東健) 등은 그 죄상을 기록하여 문책하도록 보고하였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도민의 칭송을 받을 만한 정치를 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죄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상이다.


〈제주 암행 어사(濟州暗行御史) 심동신(沈東臣)을 소견(召見)하였으니, 목사(牧使) 정우현(鄭愚鉉), 前목사(牧使) 임백능(任百能), 前前牧使 목인배(睦仁培)·채동건(蔡東健), 前판관(判官) 구재린(具載麟), 前대정현감(大靜縣監) 김기휴(金沂休) 등을 죄주고, 판관(判官) 구원조(具源祚), 前前 대정현감(大靜縣監) 강이진(康履鎭), 정의현감(旌義縣監) 강만식(康萬埴) 등에게는 포상을 베풀고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조선왕조실록 철종11년2월28일)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에 제193대 통제사 채동건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사공들이 세운 불망비가 있다. 「資憲大夫三道統制使蔡公東健不忘碑 自西莅南 除布以惠 營寨增光 蠲債以方 設砲壯圉 國之楨幹 塡海成市 民之怗恃 今我閏料 買土收稅 赤公厚德 爰以恒式 耋艾咸樂 沒世難諼 飢飽可調 維石嶕嶢 崇禎紀元後五癸酉八月 日 沙工等立 撰寫 許濼」


묘는 진건면 배양리에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네이버백과사전, 북제주군 비석총람 737쪽)
《작성 060521, 보완 1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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