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도회 없애..조천리 공마감관오영구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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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도회 없애..조천리 공마감관오영구폐석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1.05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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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람들이 입은 은혜 이 돌에 짓고 새겨 천년 세월 전한다’

조천리 공마감관오영구폐석

공마감관오영구폐석(貢馬監官吳永救弊石)
위치 ; 조천리 비석거리
유형 ; 선정비
시대 ; 조선시대(1865 혹은 1889)
높이 83㎝, 너비 31㎝, 두께 12㎝

▲ 조천리_오영구폐석


비문은 전면 중앙에 〈貢馬監官吳永救弊石〉라고 되어 있고, 우측에 작은 글씨 한 줄로 〈都會革罷 玆庸銘勒〉, 왼쪽에 한 줄로 〈船人蒙惠 以傳千祀〉라고 되어 있다.

후면은 〈己丑 六月 日〉이다. 읽는 차례는 都會革罷 船人蒙惠 玆庸銘勒 以傳千祀로 해야 한다. ‘도회를 없애어 뱃사람들이 입은 은혜 이 돌에 짓고 새겨 천년 세월 전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회(都會)는 공행 즉 공무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의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 비용은 모두 현민의 세금에서 충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주의 말을 싣고 떠나던 공마선의 격군(格軍, 노 젓는 사람)과 진상되는 말의 수는 상상 이상이었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의하면 고종9년(1872) 5월에 공마감 김명각(金明珏) 등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이 100여 인이나 되었다.

이는 목사 조희순이 발선(發船)을 독촉한 때문이었다. 최소 100인 이상의 규모로 선단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에서 해마다 보내는 세공마의 수는 조선 초기 이래 매년 100필씩 바치다가 인조19년(1641)부터는 200필을 바쳐야 했고, 식년(式年=子, 卯, 午, 酉年)에는 600필에 가까운 말을 바쳐야 했다.


비문은 공마감관 오영이 이러한 도회를 없애니 뱃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는 내용이다. 말을 실은 공마선이 순풍을 맞아 출항했다고 해서 모두 정확하게 도회(강진이나 해남)로 도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도착지가 목적지와 다른 경우가 종종 생겼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마를 아무데나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말 먹이도 준비해야 하고, 수십인의 격군에게 제공할 식량도 준비해야 하고, 한양으로 말을 데려갈 견마군(牽馬軍)도 징발해야 하고, 공마를 인계인수하는 복잡한 절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부담이 있었기에 강진과 해남이 번갈아 그 부담을 지도록 한 것이다. 제주도에서 간 사람들에게 생기는 문제는 도회가 아닌 곳으로 잘못 입항했을 때이다. 도회가 아닌 곳에서는 숙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폐단을 오영이 고쳐 없앴다는 것이니 뱃길이 순조롭지 못해 정해진 도회가 아닌 곳에 정박하더라도 언제든지 숙식을 제공해 주도록 제도를 고쳤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 공마감관 오영은 어떤 사람인가? 공마감이 어떤 품계의 벼슬인지, 오영이 어느 시대 어느 집안 사람인지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나 탐라지 등에도 나오지 않는다.

국어사전에는 감관에 대해서 <조선 시대, 각 관아나 궁방(宮房)에서 금전이나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거나 중앙 정부를 대신하여 특정 업무의 진행을 감독하고 관리하는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다만 다음 기사를 통해 추측해 볼 따름이다.


〈무릇 진상 물품을 서울로 가지고 갈 때에는 물건을 감독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영사(令史=아전)들이 공물 운반을 꺼리고 싫어하니 소임을 띄고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으로써 가지고 가게 하는데 모두 따르는 사람(從人)이 있다.〉(이원진의 탐라지 貢獻條)


〈이번 제주 세공마를 이끌고 온 장교는 賞으로 품계를 올려주고, 색리(色吏)는 첩지(帖紙)만을 주고 가자하라.〉(승정원일기 고종17년(1880) 8월 26일)


위 기록을 통하여 ①말을 포함하여 공물을 진상하러 가는 뱃길을 일반관리뿐만 아니라 아전들조차 꺼려 했고 ②진상의 일을 담당한 관리가 별도로 있지 않아 그때그때 임시로 맡겨 수행토록 했음을 알 수 있다.

곧 공마감은 상직이 아니라 진상할 때만 뽑아서 일을 맡아 감독하게 했던 임시관리직이었고, 오영이라는 인물은 제주목이나 정의현 혹은 대정현의 군관이나 아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마감에 임명된 오영이 말을 싣고 강진이나 해남으로 향했는데 어떤 계기로 뱃사람을 대신하여 공마수송의 어려움을 호소하여 도회가 융통성 있게 운영될 수 있도록 건의를 했을 것이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제주 공마선에 대한 도회가 배의 사정에 따라 강진이든 해남이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른 비석들은 끝에 ‘-碑’라고 되어 있는데 이 비석은 ‘-石’으로 되어 있다. 이 점도 오영이 군관이나 아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하는 이유가 된다. 조선사회는 엄격한 신분사회로서 목사(正3품), 판관(從5품), 현감(從6품) 등과는 비교조차 되지 못할 사람의 비석에 똑 같이 ‘-碑’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건립시기는 己丑年이면 1829년, 1889년이 해당되는데 1889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유는 많은 선정비들이 1800년대 중반에 건립되었는데 그 비석들과는 석질이 다르고 새겨진 깊이 등을 봤을 때 보다 후대일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공마(貢馬)가 돈으로 대신하게 된 연도가 1895년이니 그 이전의 비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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