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독립운동가..조천리 남강이승훈적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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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독립운동가..조천리 남강이승훈적거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03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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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의숙(講明義塾),"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인재 양성

조천리 남강이승훈적거지
 

위치 ; 조천리 연북정 남쪽 좁은 길로 들어서서 50여m 후에 서쪽으로 돌아 30여m 지점(조천읍 전 김형달 면장 가옥)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

▲ 조천리_이승훈살던집
▲ 이승훈

이승훈(李昇薰, 1864년 4월 25일-1930년 5월 9일)은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호는 남강(南岡), 호적상 이름이 인환(寅煥)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빈한한 서민 집안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16세에 유기상의 점원이 되었으며 10여년 동안 유기행상·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공장경영방법을 개선하여, 노동환경을 일신하였고, 근로자의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됨이 없이 평등하게 그들을 대접하여 근로자들의 생산능률은 향상되고 품질도 좋아져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다.

하지만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 전쟁의 발발로 파산하게 되었다.

44세 (1907) 헤이그 밀사 사건과 고종(高宗)의 양위(讓位) 소식을 듣자 그는 개인의 일보다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 7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단발, 금연, 금주를 단행하고 민족을 위해서 교육과 산업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

먼저 용동(龍洞)에 소학교인 '강명의숙(講明義塾)'을 세워 신교육(新敎育)을 시작하고 그 해 12월 24일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중심 인물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사회사업에도 눈을 돌려 신민회(新民會)에 강비하고 평북(平北) 총감(摠監)으로 활약하며 서적 출판 및 판매회사인 태극서관(太極書館)의 관장도 역임하여, 민족 운동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운동을 시작하였다.

46세 (1909)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사장이 되었으며, 회사의 이익으로는 오산학교의 학생들을 키우고 철저한 민족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또 이 해에는 오산학교와 남강의 이름이 알려져 정주역에서 황제를 알현하기도 했다.

47세 (1910) 때 한일합방이 되자 많은 인사와 지도자들은 광복 운동과 국권 회복을 위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남강은 끝까지 국내에 남아서 신민회 사업과 교육 사업을 계속하였는데, 이는 나라 잃은 후회와 설움에 잠기기 이전에 나라의 힘이 약해져서 남에게 빼앗기게 된 원인을 살피고 다음 시대를 준비하려는 예언자적 태도라 하겠다.

한편, 남강은 그 해 9월에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용동에 돌아와 학교 옆에 교회를 지은 다음, 학교의 교육 주지도 기독교 신앙으로 하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 교육을 하며 또한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기 위해 고심 분투하였다.

그러나 남강의 이런 일련의 노력에 대해 일본인은 따가운 눈초리로 주시하다가 급기야는 남강의 자기회사도 강탈하였으며 남강마저 제거하려는 시기만 노리게 되었다.

48세 (1911) 南岡은 2월, 서울에 가다가 경찰의 불심 검문에서 안중근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의 명함을 가졌다는 이유로 검거되고 1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를 당한다.

이 사건은 '안악사건' 또는 '안명근사건'이라고 하는데 안명근을 중심으로 독립투사들이 독립군을 양성할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중이었다.

이 때 안명근은 종신 징역형을 받았고, 그 외에도 많은 인사가 이유 없이 감옥에서 고생을 했으나 南岡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제주도에 유배만 되었다.

그러나, 남강은 제주도에서도 기독교 사상과 신교육, 새로운 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하며 교육과 문화 사업을 일으켰다.

일제시대 민족교육학교로 유명한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은 젊은 시절 상인으로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지내다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담하게 된다.

사업의 실패를 딛고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신민회활동과 인쇄소의 일종인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서적의 공급을 원활히 하는 데 힘썼다.

1911년 가을에는 안악사건의 연장선에서 105인 사건이 일어나 신민회 간부와 600명의 애국지사가 잡혔는데 남강도 주모자로 지목돼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출옥후 오산학교로 돌아가 교육에 종사하고, 동아일보사장,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 1930년 생애를 마감하였다.

남강이 제주에 도착한 것은 4월말(또는 5월초)로 추정되어지며 이해 10월에 [105인 사건]으로 경성으로 이송된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유배생활은 5-6개월에 불과하다.(제민일보 111호, 1990.10.11.)

南岡은 여러 해의 옥고와 바쁜 생활로 인해 그렇게도 강인하던 체력을 거의 상실하여 마침내 5월 9일 새벽 4시에 협심증으로 그의 생을 마치고 말았다.

南岡의 장례식은 5월 17일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하였는데 유해(遺骸)는 선생의 유언대로 서울로 운구되어 해부(解剖)를 하고 학생들을 위한 생리표본(生理標本)으로 철제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렇지만 일본은 南岡의 최후 유언마저 허락하지 않고 학생들과 조선 사람들에게 자극이 된다고 하여 그 뼈를 강제로 수습하여 五山學校 뒷산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연북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래된 초가. 낡은 대문을 들어서면 작은 마당을 앞으로 하고 현무암 벽에 시멘트를 바른 이 초가의 벽에는 이 집의 내력을 적은 초록동판이 벽에 붙박혀 있다.

이 곳이 조선 말기의 교육운동가 남강 이승훈선생이 6개월 정도 유배생활을 했던 집이다.


남강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어 제주에 머무를 당시의 사정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료를 종합해 보면 조천리 소재 유배지서 기거하면서 역시 유배중이던 박영효 등과 교류하였고 제주읍에 나가 성내교회(현 서부교회)에 출석하면서 부설 영흥(永興)학교의 교육활동에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짧은 유배기간 동안 민족운동과 개화주의자의 모습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본에 의해 최초로 제주에 유배된 유배인이자, 제주의 마지막 유배인으로서 길고 긴 제주도 유배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한편, 金基錫의 「南岡 李昇薰」에는 〈제주교회의 김장로의 알선으로 교회당 옆에 있는 조그만 숙사에 유숙하면서 낮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일을 도왔고 밤에는 등잔 아래서 성경공부와 기도로 나날을 보냈다...(중략)...

제주에 있는 동안 남강의 생각은 역시 민족운동과 개화주의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곧잘 교회와 학교로부터 강설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족주의의 고취와 민족성개조에 대한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며, 서부교회 남쪽 길가에는 남강선생적거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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