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서린 판관의 용기..김녕리 사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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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서린 판관의 용기..김녕리 사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04 0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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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시 굴 속에 살면서(常居窟中) 농사의 풍흉에 요망을 부렸다.(作妖興凶).

김녕리 사굴

위치 ; 구좌읍 동김녕리 김녕사굴
유형 ; 전설유적

▲ 김녕리_사굴내부.

제주도실기(濟州道實記) 등 기록을 요약해 보면 본디 이 김녕굴에는 닷섬들이 항아리만큼이나 굵고 귀가 달린 큰뱀이 살고 있었는데 늘 요사스런 재앙을 부렸으므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한 번씩 酒食을 마련하여 제사지내고 15세 되는 처녀를 한 사람씩 제물로 바쳤다.

만일 굿을 하지 않으면 그 뱀이 나와 이 밭 저 밭 할 것 없이 곡식밭을 다 휘저어버려서 대흉년이 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매년 처녀 한 사람씩을 재물로 바친 것이었다. 양반의 집에서는 딸을 잘 내놓지 않았다.

무당과 같은 천민의 딸이 으레 희생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무당이나 천민의 딸은 시집을 가지 못했다.

이러할 즈음 조선조 중종때 서판관이 부임하여 왔다. 서린은 고려 시대 외교로 이름을 떨쳤던 서희의 후손으로 열아홉살의 젊은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제주판관에 부임했는데, 이말을 듣고 괴이한 일이라 분개하였다.

예년과 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창검으로 무장한 군교 수십명을 거느리고 그 자리에 대기했다.

제(祭)가 끝나자 뱀이 기어나와 제물로 바친 처녀를 삼키려 하므로 서린과 군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뱀을 죽이고 불태워 버렸다. 이 때부터 재앙을 입는 일은 없어졌다.


탐라기년(탐라기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을해(乙亥 1515). 중종(李朝 中宗 10년). 봄3월(春三月) 판관 서린이 김녕굴에서 요사스러운 뱀을 죽였다.(判官徐憐殺妖蛇于金寧窟)


이 일에 앞서서(先是), 한 마리의 요사스런 뱀(蟒·이무기)이 있었는데, 크기가 50말(五石) 들이 항아리(缸)만하며, 항시 굴 속에 살면서(常居窟中) 농사의 풍흉에 요망을 부렸다.(作妖興凶).

이곳 사람들이 매번 정초(土人每於歲初)[일설에는 봄과 가을(一云春秋)] 술과 음식을 갖추어(具酒食) 이것에 제사를 지냈다(祭之).

처녀 한 사람을 바치는데(供一處女), 나이가 만 15세인 자가 대신 희생 되었다(年滿十五者以代牲).


그렇게 아니하면(否則) 갈피 모를 바람과 괴이한 비(盲風怪雨)가 한 해 가도 그치지 않았다(終歲不止).


서린은 나이가 어렸지만 담력이 있었다(徐憐年少有膽力).


“어찌(豈) 요물이 죄 없는 이를 죽이는 것을 참아있겠는가(忍以妖物殺無辜乎)?”


그는 군교 수십명을 가려서(擇軍校數十人) 창과 칼을 가지고(持鎗刀), 땔나무(薪)와 술, 그리고 화약으로 염초(焰硝)를 준비하였다.


전과 같이 제사상을 차리니(依前設祭), 큰뱀(大蟒)이 정말로(果) 머리를 내밀어(出頭) 처녀를 잡아먹으려고 하였다(將噉處女).


서린의 손에 있던 창이 위로부터 아래로 꽂히고(徐手鎗從高刺下) 모든 군교들에게 창으로 마구 찌르게(亂槊) 하고는 끌어내어(曳出) 불을 놓아 태우니(置火燒之), 비린내(腥穢)에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不可近). 이로부터(自此) 뱀의 요망함은 완전히 사라졌다(蛇妖遂絶).


서린(1494~1515)은 관아에 도착하여 10여 일 만에 졸(卒)하였으니, 당시 나이가 19세라 한다. 본관은 이천, 강원도 홍성 출신. 중종6년(1511)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중종8년(1513) 2월 제주판관으로 도임하고, 1515년 4월 10일 죽었다.(제주일보160801 부상호 글)

그러나, 서린 판관은 제주성으로 돌아온 후 시름시름 앓다가 며칠 못가 죽어 버렸다고 한다.

증보탐라지를 보면 서린은 중종10년(1515) 4월10일 제주판관 재임중에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1982. 334쪽)

유해는 제주도민의 호송을 받아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덕은동 보개산에 안장되었다.(현장의 안내판)

그런데 전설은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서 판관이 뱀을 처치하는 것을 본 무당이 '빨리 말을 타고 성안(제주시)으로 가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됩니다.' 라고 말하였다.

서판관은 말에 채찍을 놓아 성안으로 향했다. 무사히 성 동문 밖까지 이르렀다. 이때 군졸 한사람이 '뒤쪽에서 피비가 옵니다.' 라고 외쳤다.

'무슨 비가, 피비가 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하며 서판관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순간 말에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뱀이 죽자 그 피가 하늘에 올라 비가 되어 서판관의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현용준의 『제주도 전설』)

굴 입구에는 서린판관기념비가 있다.
《작성 061016, 보완 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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