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삼상논책상소..창천리 임관주마애명(任觀周磨崖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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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삼상논책상소..창천리 임관주마애명(任觀周磨崖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07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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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에 한시 짓는 풍토 있었던 것은 임관주의 영향

창천리 임관주마애명(任觀周磨崖銘)

 

위치 : 안덕면 창천리 창고천 다리(일주도로) 남쪽 하천을 따라 300여m쯤 가면 절벽 하단에 암각되어 있다.
시대 ; 조선
유형 ; 마애명

▲ 창천리_임관주마애명

정언 임관주는 1767년(영조 43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삼상(三相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논책상소문을 올렸다


〈대저 나라에 있어서 언로(신하로써 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는 사람에게 이목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실로 귀로 하여금 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눈으로 그 밝음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그를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오호라, 전하의 뜻이 한결같이 좌우하여 따라 붙은 것이 불어오는 바람 앞의 풀과 같은데 빼어나게 송백이 될 자가 몇 사람이겠습니까?

말을 하게 하여서 상을 주어도 오히려 기피하는데 하물며 그렇지 못함에랴? 전후하여 말을 하였다가 죄를 얻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울러 상소를 용서받는다면 조야(朝野)가 서로 기뻐할 것이고, 풍채가 갑자기 변할 것입니다. …

이명운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수탈만 일삼고 7천 명의 기민(饑民)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명운을 영원히 금고시키고 그 전형의 관원에게 빨리 파직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봅니다. …〉

이에 임금은 오히려 노하여 대정현으로 가극안치하라 명하였다.

이듬달 그는 영암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에 이르자 풍랑으로 후풍하게 되었다. 이때 사공이 78년 전 제주목에 유배가던 우암 송시열의 후풍시가 이곳 백도 암벽에 새겨져 있다 하여 올라가서 글을 써 화답하고 음각하였다.

별도포에 도착한 그는 창천촌에 적거를 정해 독서에만 열중하였는데 집 주위에는 가시덤불이 둘러져 있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쳤는데, 20년 전까지만 해도 창천에 한시를 짓는 풍토가 있었던 것은 바로 임관주의 영향이었다.


그가 적거한 지 두 달이 지난 9월 대신들이 바른 말을 하는 관리를 섬에 계속 둘 수 없다 하여 그는 특별히 석방되었다. 그는 해배되자 제주의 산천을 두루 구경하고 적거하던 창천촌에 마애(석벽에 글자를 새김)를 남겼다.

始出荊門日 처음으로 가시나무로 만든 문을 나서던 날에
先尋枕下川 베개 밑 시냇물을 먼저 찾았네.
蒼巖三曲立 푸른 바위 세 굽이 둘러섰는데
短瀑晩楓邊 늦가을 단풍가에 작은 폭포가 걸려 있네.


(또는 처음으로 귀양살이하던 집을 나서는 날에 가까이에 있는 시냇물을 먼저 찾았네. 푸른 바위는 세 물굽이 곁에 둘려 있고 늦가을 단풍가에 짧은 폭포가 있네.)

이 시는 유배가 끝난 다음 날 지었다고 한다.(제주도정 1999년 3월 5일) 그는 창천촌의 창고천 외에 한라산 백록담, 천제연, 산방굴사에도 마애명을 남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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