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논 개간..중문동 천제연관개수로(성천답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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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논 개간..중문동 천제연관개수로(성천답수로)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1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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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채구석이라 하지 말고 채똑똑이라 하시오."

중문동 천제연관개수로(성천답수로)
 

天帝淵灌漑水路
등록문화재156호(2005년 4월 15일 지정)
위치 ; 중문동 2785-1번지 일대. 천제연 폭포 구역 동쪽 절벽
시대 ; 조선시대

 

▲ 중문동_천제연성천답수로(2006).
▲ 중문동_화폭목_수로(2006).

대정군수를 지냈던 채구석(1850~1920)은 중문에 살게 되자 ‘천제연 물을 이용해 논을 만들면 만인(萬人)이 살 수 있을 것’이라며 현장 답사를 벌이고 수로를 계획했다.

이 일은 중문동 출신의 한학자이며 교육자로서 대정초등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이재교(李在喬)의 권유에 따라 시작한 것이며 추진 과정에서도 이재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집필 김웅철)


1905년부터 3년간 지세를 답사하고 물길을 열어 성천봉(星川峯) 아래로 물을 대어 1908년 5만여평의 논을 개간하였다.

채구석이 주창해 이태옥, 이재하가 참여하면서 이 3인은 공동으로 수주(水主)가 됐다. 천제연폭포 구간 내 총 1.9km의 천연암반 관개수로 공사에는 중문, 창천, 감산, 대포 등의 주민들을 동원해 만들었으며, 천제연의 낙수를 끌어 오기 위해 지형이 험한 절벽과 156m에 달하는 암반지대를 뚫고 물길을 만드는 것은 난공사였다.

곡괭이와 정으로 암벽을 깨고 물골을 냈다. 일본에서 곡괭이를 배에 가득 싣고 올 정도로 많은 인력이 동원됐다. 수로는 지형에 따라 넓이가 1~2m, 깊이는 0.5~3m로 설치됐다.


단단한 암반지대는 화약을 화포에 넣어 바위를 부수고 뚫었다는 얘기도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화약을 구하기 어려워 선조들은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지혜를 짜냈다. 암반 위에 장작을 쌓아 불을 붙여 돌을 달구었고, 소주 원액을 부어 더욱 뜨겁게 가열한 후 일정 시간이 흐르면 찬물을 끼얹었다.

열기에 팽창된 바위는 차가운 물로 갑자기 수축돼 금이 쩍쩍 가면서 갈라졌다. 약 100년 전 팽창과 수축이라는 과학 원리를 이용해 단단한 암반을 깬 것이다. 첫 공사 구간은 천제연 1단 폭포에서 베릿내오름(성천봉)을 돌아 동쪽으로 뻗어 제주국제평화센터까지 이르렀다.

가장 힘들었던 난공사는 폭포 내 창구목과 화포목으로, 지금도 그 유허가 남아 있다. 2차 공사는 천제연 2단 폭포에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옛 너베기 지경)까지 구간이다.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시행돼 약 2만평(7㎡)의 논이 추가로 개척됐다. 채 군수는 공사가 완료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위치에 따라 1차 구간은 웃골수로, 2차 구간은 알골수로라 불려졌다. 완공된 이후 성천답회(星川畓會)에서 관리해 왔다. 물을 고르게 분배해 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관리자로 수감(水監)을 두었고, 수고비로 1년에 논 한마지기(약 200평)의 쌀을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개척한 농경지는 60년이 넘도록 쌀을 생산했다. 관개수로와 논은 1971년 중문관광단지로 지정되면서 소유권이 국가로 이전됐다.

주민들은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건립한 수로 부지와 시공물에 대한 보상을 정부에 요청했으나, 아직까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제주일보 130407)

현재는 천제연의 산책로를 따라 약 100여m에만 물이 흐를 뿐 이후는 사용을 않고 있다. 1957년 8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서귀포시 중문동 천제연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2003년에는 천제연 3단 폭포 옆에도 세워졌다. 밭농사에 의존해 식량을 구하다가 수로와 옥답을 만들어 쌀농사를 짓게 해준 데 대한 주민들의 고마움이 담겨 있다.

문화재심의위원회는 최근 정비복권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콘크리트로 개조해 변형되기는 했으나 당시 제주도민의 생활상과 농업환경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원이라고 평가했다.

서귀포시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21억원(국비 11억원 포함)을 들여 성천봉 서남쪽 절벽에 관개수로를 따라 목재산책로를 만드는 한편 수로를 정비해 도내에서는 낙차가 가장 큰 59.6m의 인공폭포를 조성한 바 있다.(엠파스 한국학지식, 문화재청, 제주일보, 네이버지식백과)


한편, 천제연에는 양쪽으로 3개의 물길이 있다. 동쪽에는 웃골과 알골, 서쪽에는 섯골 수로가 있는데 섯골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섯골은 1883년 색달리에 사는 김천총씨가 착공은 했으나 자본이 부족해 대정군수를 지낸 송경연 선생이 5년 간의 공사 끝에 1887년 완공했다.

이 구간은 개여물캐(현재 퍼시픽랜드 일대)에 물을 대어 논을 만들었다. 이성무씨는 “채구석 군수보다 20년을 앞서 첫 수로를 개척한 것이 섯골”이라며 “섯골 수로 공사 때부터 바위에 장작불을 때고 팽창과 수축의 원리로 암반을 깨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섯골 수로는 흔적이 거의 남이 있지 않고, 관련 사료가 부족해 후대로부터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맨 먼저 만들어졌다”고 강조했다. 논이 생기면서 지주와 소작농은 7대 3 또는 6대 4 비율로 생산된 쌀을 나눠 가졌다.(제주일보 130407)

채구석은 1850(철종 1)∼1920.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강(平康). 일명 두석(斗錫). 제주 출신. 아버지는 종관(宗寬)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본래는 제주성내에 거주하였으나 뒤에 중문(中文)으로 이주하여 살았으며, 시에도 능하였다.

1894년(고종 31) 제주판관 재임시 제주에 흉년이 들자 봉록을 의연(義捐)하여 기민(飢民)들을 구제하였고, 1895년 대정군수 재직시에는 주민 강유석(姜瑜奭)과 송계홍(宋啓弘) 등이 난을 일으켜 갑오경장 후의 신제도실시에 반대하여 경무청(警務廳)을 파괴하자, 전 부사 김윤병(金潤柄)과 함께 관군을 인솔하여 이를 토벌하고 난을 진압하였다.

이재수란에서는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이 상무사의 대표격이었던 그를 이 사건의 책임자로 조정에 무고하였기 때문에 대정군수직에서 파면되었다.(Digital 한국학)

신축교란의 결과 10월 9일에 이재수·오대현·강우백은 사형이 확정되어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머지 김남학·조사성은 징역 15년, 고영수·이원방은 각각 10년에 처하여졌다. 이 때 채구석도 주모자로 몰려 사형 언도되었으나 민요(民擾)에 대한 '배상금청산책임자'로 되어 광무 6년(1902년) 8월 4일에 석방되었다.

배상금은 교당 파괴와 두 신부의 집물 보상으로 4천 1백 60원, 용인 필살 휼금으로 1천원, 도합 5천 1백 60원이었다.

그러나 채구석이 감당할 수 없어 광무 8년(1904년)에 삼읍 도민이 균등 변상하기로 하고 원리금을 합하여 은으로 6천 3백 15원 21전 2리 2모를 거두어 변상하였다.

채구석은 그 사람됨이 매우 똑똑하다 하여서 '채똑똑이'라고 불리었다. 이러한 별명이 붙게된 연유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어느 해, 그가 진사 교지(관직을 내리는 입명장)를 받고자 서울로 올라갈 때였다. 그 당시만 하여도 제주 사람에 대한 서울 사람들의 인식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올라갈 때부터 생각한 일이 바로 어떻게 이번 서울길에서 서울 사람들을 혼내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서울 거리에 들어서서는 그곳 시장을 구경하게 되었다.

상인들을 헙수룩한 시골 선비를 보고 물건이나 많이 팔아 볼 양으로 그를 상점 안으로 안내하였다.


"어서 오시오. 시골 양반"
주인은 시골 양반이라는 데에 더 힘주어 말하였다.


"물건을 좀 삽시다."
시골 사람 답지 않게 채구석은 의젓이 들어갔다. 그는 이것저것 한참이나 물건을 구경한 다음에 모자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그 모자는 상점주인이 보기에도 여러 모자 중에 가장 좋은 것이었다.

돈을 치르고는,
"내 조정에 다닐 일이 있어 가는 길이니 일을 마치고 이것을 찾아갈 동안 좀 간수하여 두시오."
이렇게 부탁하여 두고는 나왔다. 주인은 생각하니 뭔가 손해를 본 것만 같았다. 물건 고르는 눈도 그렇거니와, 그 의젓한 말씨하며 도저히 촌놈이라고 생각한 자기가 오히려 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상점 주인 또한 오기가 생겨 그 모자를 절대로 돌려주지 않으려고 생각하였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 많은 모자 중에서 자기가 사 놓은 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무슨 증거로 자기 것을 주장한단 말인가. 며칠 후에 채구석은 일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그 상점에 들렸다.


"내가 맡긴 모자를 이리 내주시오." 역시 의젓하게 모자를 요구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주인이 내놓은 모자를 물론 채구석이가 애초에 사서 맡겼던 그 모자가 아니었다.
"이건 제 것이 아닌데요."


채구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주인은 용하게도 알아보는 그를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다른 모자를 내놓았다.
"이것도 아닙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주인의 얼굴을 쏘아보듯 바라봤다.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느냐는 힐난의 표정이었다.
"아니 그게 당신 것이 아니라면, 낸들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


이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새 모자를 내놓았다.
"그것도 아닙니다."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주인은 정말 이 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 모자를 알아보고 그러는지 알고 싶어서 이번에는 한구석에 밀쳐 두었던 진짜 모자를 내놓았다.

그러자 채구석은 그 모자를 한 번 들어 보고는,
"아, 바로 이게 제 것입니다."
하면서 그 모자 안에서 무엇을 뒤적뒤적하더니 바늘 하나를 꺼내었다.


"아니, 그게 바늘이 아니오?"
주인은 놀라서 물었다.
"그렇소. 이게 바늘이오."
"그런데 왜 그게 그 자리에 있소 ?"


채구석은 빙그레 웃으면서 주인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당신이 나를 속이고 다른 모자를 내줄 줄 나는 미리부터 알았던 거요. 그래서 내가 모자를 사면서 이 바늘을 살짝 찔려 놓았던 거요."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더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난 당신이 헙수룩한 시골 선비로만 알았지요. 정말 당신을 서울 사람 뺨칠 정도로 똑똑한 분이구료."


"여보, 서울 양반, 서울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업신여겨서야 어디 서울 사람 아닌 사람이 서러워서 살겠소?"


이렇게 뼈 있는 한마디를 남기로 자리를 떠났다. 돌아와서 제주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채구석은
"서울놈들도 별수가 없더군."
하고 웃었다. 그러자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당신 이제부터는 채구석이라 하지 말고 채똑똑이라 하시오."


이렇데 말하고는 다시 한바탕 웃었는데, 이런 일이 있는 이후부터 그를 채똑똑이라 불렀다. (http://www.gulnara.net/ "글나라")
《작성 061027, 보완 130708, 1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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