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화전촌..동광리 무등이왓(잃어버린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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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화전촌..동광리 무등이왓(잃어버린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13 0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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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검의 난과 방성칠의 난의 핵심 세력이 바로 이 곳 출신

동광리 무등이왓(잃어버린마을)터
 

관련 사건과 시대 ; 강제검의 난(조선), 방성칠난(조선), 사삼사건(대한민국)
유형 ; 없어져 버린 마을 터

▲ 동광리_무등이왓집터올레
▲ 동광리_무등이왓표석

찾아가는 길 ; 안덕면 동광6거리는 한림, 대정, 창천, 제주시 등 주요 방향으로 향하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현재 이 곳에는 검문소와 주유소가 있다.

6거리라는 말 그대로 사통팔달한 도로망의 만나는 접점 광청리(지금의 동광리와 서광리), 따라서 이 곳은 민란군의 중간 집결지가 되었을 것이다.

서부관광도로를 타고 가다가 금악 방면으로 빠지는 입체 교차로로 내려가면 곧 동광 6거리가 검문소가 나온다. 이곳의 여섯 갈래 길 중 주유 휴게소 옆길로 1Km 조금 못 가면 오른쪽에 있는 '무등이왓 잃어버린 마을' 표석을 만날 수 있다.

무등이왓은 제주도 민란의 진원지라고 불리는 대정 지경에 있고 강제검의 난과 방성칠의 난의 핵심 세력이 바로 이 곳 출신이었다는 게 더욱 눈길을 끈다.

두 민란 모두 중산간 지역의 화전세 과다 징수가 문제가 되어 일어났던 것인데, 이 곳 동광 일대가 당시 중요한 화전촌이었던 까닭에 이 곳 사람들은 민란의 주축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제주 임술민란의 주역 강제검은 동광리 무등이왓(동광6거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 노인들은 강제검을 강형방(刑房)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호칭은 그가 화전촌 출신이면서도 한 때 향리(鄕吏)직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곳 노인들은 얼마 전까지도 무등이왓 위쪽에 강제검의 집터와 무덤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주 임술민란의 또 다른 주역인 김석구 형제가 처음 포섭한 김두일도 이 곳 광청리 사람이었다.

1898년 방성칠 난의 주역이던 남학당 사람들도 대부분 이 곳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이 곳 동광 무등이왓 근처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는데, 본래 그들은 전라도 일대에서 살다가 동학농민전쟁 실패 후 탄압을 피해 이 곳으로 밀려들어왔던 사람들이다.

이 곳에 잠입해 온 그들은 당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화전 경작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마침 동광 일대는 화전 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던 중이라 그들에게는 적당한 정착지가 되었을 것이다.

저항의 전통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1936년에는 이 곳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면 거부하는 무극대도교가 창도(創道)되기도 했다. 게다가 해방정국에 이 곳 주민들은 미군정의 잘못된 미곡정책을 강력히 규탄하며 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댓가인지 4.3 당시 이 마을 사람들은 군경토벌대에 의해 극도로 탄압을 당해야만 했다. '큰넓궤'로 피했다가 결국 잡혀 정방폭포 일대에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도 바로 이 곳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무등이왓, 조수궤, 사장밭, 삼밭구석 등의 마을 역시 4.3 때 불에 타 없어졌다. 그리고 여태껏 복원되지 않고 있다. 이 마을이 사라질 당시 무등이왓만 해도 약 130 가구였다고 하니 그 피해를 짐작할 만하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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