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나례구경 바위..상효동 관나암 마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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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나례구경 바위..상효동 관나암 마애명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17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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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석각으로 추정된다

상효동 관나암 마애명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 1605번지 일대. 효돈천 구 영천관 터 서북쪽. 서귀포시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맞은편 상효교(上孝橋) 아래로 500m 정도 거리에 영천천(靈泉川)[지금의 효돈천] 서쪽 둔덕
유형 ; 마애명
시대 ; 조선(추정)
문화재 지정되지 않음

 
 

냇가의 큰 바위(높이 약 2.5m)에 해서체로 觀儺岩(관나암)이라 새겨져 있다. 글씨의 크기는 가로 세로 10cm 정도이다.

누가 어느 때 새겼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글자가 새겨진 벽면이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등지고 있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저술한 탐라지초본(1843년)에 의하면, 〈영천천 냇가 큰 바위에 관나암(觀儺岩)이라는 석 자가 새겨져 있다.

옛날 영천사의 스님이 새긴 것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관나암이란 나례(儺禮)를 구경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오문복 선생은 관나암이 영천관에서 영천사 쪽의 나례(儺禮)를 구경하였던 장소가 분명하다고 했다.


나례는 역귀 즉 돌림병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굿)이다. 나례라는 것은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건너온 풍습이다.

〈고려사〉에 1040년에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그 이전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의 계동대나의조에 보면 궁중의 나례는 중국 후한에서 행해진 나의와 연출양식은 물론, 사용되는 가면과 주문, 가사까지 동일했으나 춘하추동 4계절에 행한 중국과 달리 섣달 그믐의 대나만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섣달 그믐날 각 가정에서 부뚜막의 헌 곳을 새로 바르고, 거름을 치워내고, 가축우리를 치워 새로 짚을 넣어 깔아주며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을 하고, 한밤중에 마당에 불을 피우고 북을 치거나 폭죽을 터뜨려 집안에 있는 잡귀를 몰아내고 깨끗하게 새해를 맞이하던 풍습으로,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는 나례 의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 궁중의 나례 의식은 고려 정종(靖宗) 6년 무렵에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권64 지(志) 권18 예(禮) 6 군례조(軍禮條)의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에 의하면 12월에 대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12세 이상 16세 이하의 사람을 뽑아 진자로 삼아 이들에게 가면을 씌우고 붉은 고습(袴褶 : 바지 위에 덧입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騎服)을 입힌다. 24인이 1대(隊)가 되는데, 6인을 한 줄로 하며 대개 2대이다.

집사자(執事者)는 12인인데 붉은 모자와 소창옷[褠衣]을 입고 채찍을 잡는다. 공인(工人)은 22인이며 그 중 한 사람은 방상시(方相氏:악귀를 쫓던 사람)로 황금색 눈이 4개인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걸치고 검정 웃옷과 붉은 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창, 왼손에는 방패를 잡는다. 또, 그 중 한사람은 창수(唱帥 : 驅儺할 때 주문을 외우는 사람)인데 가면을 쓰고 가죽옷을 입고 몽둥이를 거머쥔다.

고각군(鼓角軍)은 20인을 1대로 삼는데, 깃대를 잡은 사람이 4인, 퉁소를 부는 사람이 4인, 북을 가진 사람이 12인이다.

이렇게 하여 악귀를 궁중에서 쫓아낸다고 한다. 이 의식에서 사용되는 가면, 붉은 옷, 방상시, 가무악 등은 모두 잡귀를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서 민속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대에 따라 동원되는 인원과 규모·격식 등에 있어 차이는 있었다. 조선 후기 이후에는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고, 나중에는 그 유습만이 남게 되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정월 원일조(元日條)에 의하면, 대궐 안 궁전 근처에서 각각 총을 놓아 세 번 소리를 내고 지방관청에서는 우인(優人 : 화랑이)들이 허수아비의 탈을 쓰고 바라를 울리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호령을 하고 무엇을 쫓는 시늉을 하면서 몇 바퀴를 돌다가 나가는데 그것은 나례에서 끼쳐진 법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국세시기』 12월 제석조(除夕條)에 의하면 대궐 안에서는 제석 전날에 대포를 쏘는데 이를 연종포(年終砲)라고 한다.

화전(火箭)을 쏘고 징과 북을 울리는 것은 곧 대나의 역질귀신을 쫓는 행사의 유풍이라고 하였다. 한편, 민간에서도 이러한 유습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례는 이밖에 왕의 행차나 칙사의 위로, 신임사또를 위한 축하연 때 수시로 놀이되기도 하였다.

이 때 나례에서 하던 연희와 함께 광대들의 창(唱)과 예능, 기생들의 춤이 행하여졌다. 나례가 궁중의식에서 벗어나 연희화함에 따라 우인·배우·창우(倡優)·광대·재인·현수재인(絃首才人)·수척(水尺)·승(僧)·백정(白丁)·희자(戱子) 등의 이름으로 불리던, 사회의 천대를 받던 계층의 사람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여기에 악공들의 반주가 있었고, 기녀의 춤이 첨가되었으므로 희학(戱謔)을 위주로 하여 나희 또는 잡희(雜戱)라 불렸다.

또한, 이를 더욱 즐겁고 화려하게 하기 위해서 여악(女樂)도 동원되었다. 나례를 관장하는 기관으로 나례청이 있었으며, 후에는 관상감에서 관장하였다.

나례에 참여하고 잡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관에 소속되어 있다가 때로는 양반 대가의 수연(壽宴)이나 혼사에도 불려가서 연희하였다.

대궐에서 나례를 할 때에는 인정전(仁政殿)·사정전(思政殿)·명정전(明政殿) 뜰에서 거행하였는데, 탈에는 사람과 짐승의 여러 모습이 있었고 이것을 얼굴에 쓰고 표정을 내어 탈춤의 효과를 내려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상감(觀象監)의 주재하에 행해진 궁중의 나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석(除夕) 전날 밤에 창덕궁과 창경궁궐 뜰에서 나례가 벌어졌다. 그 제도를 보면 악공(樂工) 한 사람이 창사(唱師)가 되어 붉은 옷을 입고 탈(假面)을 쓴다.

또 탈을 쓴 방상씨(方相氏) 4명이 황금빛 나는 네 눈을 뜬 채 곰가죽을 뒤집어 쓰고 창을 들고 목탁을 두드리며 서로 치고 받고 한다. 지휘자 5명이 역시 붉은 옷에 탈을 쓰고 그림을 그린 벙거지를 쓰고 있다.

또 판관(判官) 5명은 녹색 옷에 탈을 쓰고 역시 벙거지를 쓰고 있다. 조왕신(부엌신) 4명은 청색 도포를 입고, 복두를 쓰고, 목홀(木笏)을 지니고 탈을 쓴다. 소기(小妓) 여럿이 여자 적삼에 탈을 쓰고 치마 저고리는 홍록색(紅綠色)이며 긴 간당(竿幢)을 들고 있다.

또 12신은 각각 귀신탈을 쓰고 있는데 자신(子神)은 쥐 모양을 하고, 축신(丑神)은 소 모양의 탈을 쓰고 있다. 악공들 20여 명이 복숭아가지로 만든 비를 들고 뒤를 따른다. 아이들 수십 명이 뽑혀서 붉은 옷을 입고 붉은 수건과 탈을 쓰고 진자가 된다. 진자는 12∼16세의 소년이었다.

창자(唱子)가, "갑작(甲作:神名)은 흉한 놈을 꺾고 필위(神名)는 호랑이를 먹고… 만일 네가 급히 가지 않아 늦으면 이들의 양식으로 만들리라. 빨리빨리 법대로 시행하렷다"고 고함을 치면 진자는 "물러가겠노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복죄한다. 이때 모든 사람이 북과 제금을 울리면서 창하면 귀신들은 드디어 쫓긴다.(위키백과)


이와 같이 나례는 세밑에 가정과 대궐에서 악귀를 쫓는 벽사에서 백희나 잡희로 연희됨에 따라 종교성은 희박해지고 점차 놀이로 변모하였다. 대궐에서 거행하던 나례의식은 현재 사라졌으나 민간에서는 아직도 섣달그믐날에 대청소를 하고 밤중에 폭죽을 터뜨려 정하고 신성하게 신년을 맞이하려는 유풍이 전승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 궁중에는 나례도감이 있었으나 지방의 나례에 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주목 관덕정 앞에서 행해지던 입춘굿은 나례의 일종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제주목에 나례와 유사한 굿이 있었으니 정의현에도 있었을 것이고 그 장소가 이곳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영천관(靈泉館)은 내[川]를 사이로 영천사와 마주한 서쪽에 있었다. 관나암과 남쪽으로 이웃한 평평한 둔덕이 그 터로 알려져 있다. 역원(驛院)과 점마소(点馬所)의 역할을 겸하기 위해 세조16년(1466) 제주목사 이유의가 창설하였다.

영천관은 대정현과 정의현을 오고가는 관리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기 위해 그 중간지대인 서귀포시 효돈천 주변에 건립한 일종의 역원이다.

또한 영천관은 조선시대 제주도 10소장의 국립목장 중 규모가 제일 컸던 9소장을 관할하기 위해 왔던 관리를 위한 봄과 가을의 점마처(點馬處)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영천관은 이곳 목장의 말을 점검하기 위해 들린 관리들을 위해 야외에서 연회를 베푸는 등 접빈관(接賓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영천사 맞은편에 영천관이 있었고, 여기에서 정기적인 목사의 점마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면, 이곳에서 행해졌던 나례는 일반적으로 각 가정과 궁중에서 세말(歲末)에 행해졌던 벽사(辟邪)로서의 나례라기보다는 손님을 맞이하여 벌인 잔치에서 행해졌던 연희(演戱)로서의 나례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관나암이 있는 내의 폭은 약 12m이다. 그 동쪽가 둔덕에 폭 6m, 가로 12m 이상 돌로 단을 쌓았던 흔적이 보인다. 지금은 나무가 자라 단의 부분만 남아있지만 인공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단으로 보인다. 이곳이 공연을 펼쳤던 무대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로 내 건너에 있는 영천사(靈泉寺)의 불교의식을 나례로 보고 그것을 구경하는 자리라는 뜻으로 새겼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당시 제주의 사찰에서 행해지던 불교의식의 성대함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영천사는 고려시대 창건되었고 영천관과 더불어 이 지역을 방문하는 관리들의 숙소 역할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영천사는 영천천 동쪽 언덕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1400년대 후반에 있었던 사찰임에는 분명하다. 지금 그 터에는 대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관나암 마애명은 영천사와 영천관 두 시설이 존립할 때 새겨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 1601년 제주에 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은 이 둘이 모두 폐사, 폐관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관나암 석각은 영천관이 설립되었던 1466년에서 1601년 이전 사이에 새겨진 석각이며, 제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석각으로 추정된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제주브레이크뉴스 2014/02/22 백규상 글)
《작성 061121, 보완 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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