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서귓개..서귀동 서귀진(멸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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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서귓개..서귀동 서귀진(멸실)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12.19 0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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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주위 251m, 높이 3.6m에 이르는 진성이었다 한다.

서귀동 서귀진(멸실)터
 

제주도기념물 제55호(2000년 11월 1일 지정)
위치 ; 서귀포시 서귀동 송산마을 713, 717번지 일대
시대 ; 조선
유형 ; 방어유적(진성)

▲ 서귀동_서귀진수로(제주의소리)
▲ 서귀동_서귀진_발굴(제주의소리)

서귀진(西歸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대왕실록』(1439. 2. 4)이다.

'서귀방호소에는 성곽이 없다고 하여 성을 쌓도록 요청하니, 허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안무사가 한승순이었으며 이를 통해 최초 축성은 세종21년(1439)대로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서귀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161척(48m), 높이 5척(1.5m)이라 기록하고 있다. 서귀진은 본래 홍로천에 있었으나 정의현(旌義縣)과 대정현(大靜縣)의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다.(두산백과)

그래서 선조23년(1590) 이옥(李沃) 목사가 현재 위치로 옮겨 축성했다. 규모는 주위 251m, 높이 3.6m에 이르는 진성이었다 한다.

이러한 서귀진의 자세한 자료는 1695년 제주목사 이익태의 탐라십경 중 하나로 서귀소(西歸所)라는 그림에 당시의 서귀진 규모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문화재청)

이러한 진성은 군사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서귀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긴 직사각형이고, 둘레 약 2,500m, 높이 약 3.6m이며,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객사·진졸청·병기고·창고 등이 있었고, 성 북쪽의 구서귀(舊西歸) 지역에는 말들을 사육할 때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잣담이 있다.

성문 밖의 북서쪽에는 활 쏘는 연습장이 있다. 1695년 목사 이익태가 제작한 《탐라십경도》 중 서귀진을 보면 병기고만 기와지붕이고, 나머지는 모두 띠(새)로 지붕을 이었다.


1601년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되었던 청음 김상헌의 남사록(南사錄)에는 "… 읍지를 음미하건대 서귀포는 곧 서쪽 홍로천 하류이니 耽羅朝 大元 때의 후풍처(候風處)라고 한다.

옛날에는 홍로천 위에 있었는데 목사 이옥(李沃) 때에 지금 장소로 이축(移築)하였다. 높이는 6척이요, 東·西 두 문이 있고 성 안에 한 우물이 있다.

성 아래로부터 구멍을 파고 물을 끌어온 것이다. … 해중(海中)에 섬 세 개가 있으니 다 석벽(石壁)이 험하게 솟아 열립(列立)하면서 서로 맞서고 있다. … 속설에 전하기를 한라산 주봉이 꺾어질 때에 갈라져 와서 우뚝 선 것이라고 한다.

성산(城山)에서 서귀진(西歸鎭)까지는 백여 리가 되는데 그 사이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고 황아(荒芽)만 들을 덮어 극망무제(極望無際)하여 이따금 군마(群馬)가 둔(屯)을 이룬 것을 볼 수 있으니 어떤 것은 개국마(皆國馬)가 수백 필에 이르고 물과 풀이 많은 곳을 가려 왕래하면서 풀을 뜯는데 운금(雲錦)이 나뉘어 흩어지는 것 같다."라고 서귀방호소 성에 대하여 기록하였다.(제민일보 1994년 10월 15일)


또 김상헌은 서귀진을 점검한 후, 천지연폭포를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남겼다. ‘천지담은 서귀포 서쪽 5리쯤에 있는데, 해구로부터 좌우는 석벽이 에워싸고 있으며, 갈수록 아름답다. 동구 속의 나무들은 모두 겨울에도 푸르다.

벽을 따라 몇 리를 올라가는데 한줄기 바위 턱을 기어오른다. 그런데 아래로는 바위가 비상하게 튀어나와 미친 듯 사람에게 다가오고, 골짜기는 늑대처럼 사나우며 백주에도 음침하다. 바람을 감추고 비를 모아 귀신이 울부짖는 것 같다. … 다만 굳게 감춰진 해외의 유람의 장소로서 세상 사람들이 올 수가 없어 그 좋은 경치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장태욱 글)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西歸城 ; 돌로 쌓았고 둘레가 825자 5치이며 높이가 12자이다. 성장(城將)이 1인 있다. 서귓개에 있다. 동성 안에 객사·별창·군기고·활터에 세운 정자(射亭)가 있다. 정모소(정방연)의 상류를 동성 안으로 끌어들여 자그마한 저수지를 만들고 물을 저장한 다음 西城 밖으로 흘려보낸다. 위 두 곳(수산성과 함께 말함)에는 제주영에서 파견한 여수가 1인씩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귀진 규모는 탐라순력도에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서귀조점(西歸操點)은 숙종28년(1702년) 11월 5일 순력(巡歷)중에 서귀진의 군사 조련과 군기 및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서귀진의 위치와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귀진 내의 건물로 병고(兵庫)와 창고, 그 외 객사(客舍) 등이 보인다. 당시 서귀진 조방장은 원덕전(元德全)이었으며, 성정군 68명과 군기를 점검하고, 목자와 보인 39명과 말 237필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서귀진 소속의 봉수는 자배봉수(資盃烽燧)·호촌봉수(狐村烽燧)·삼매양봉수(三每陽烽燧)이고, 연대는 금로포연대(金路浦烟臺)·우미연대(又尾烟臺)·보목연대(甫木烟臺)·연동연대(淵洞烟臺)이다.


동헌, 병기고, 서귀고, 서귀창, 객사 4동, 동·서 문루, 우물터 등의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탐라순력도 그림을 살펴보면 아래쪽에 새섬(草島, 여기서 '새'는 鳥가 아니라 띠의 제주어이다)이 그려져 있고, 바다에는 '西歸浦'라고 써 놓았다.

‘서귀조점(西歸操點)’은 서귀진을 점검하는 장면을 담은 내용이다. 이 그림에는 서귀진과 그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귀진은 동문과 서문이 있는 타원형의 성이고, 성벽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림에는 성 안에 있는 객사, 창고, 병고 등이 잘 그려져 있어서 당시 성내의 시설까지 엿볼 수 있다. 그림 속의 西歸浦(서귓개)는 지금은 어선과 여객선, 화물선 등 각종 선박이 드나드는 항구로 변모했다.


제주목사 이원조의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는 조방장(助防將) 1명, 치총(雉摠) 1명, 방군(防軍) 70명과 사후선(伺候船:물자나 병력을 수송하던 5인승의 초소형 군함) 1척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서귀진 아래에 있는 포구 수전포(水戰浦)는 항구가 매우 넓어 절벽을 의지하면 암벽으로 자연 방풍이 되어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춰둘 수 있었다.

(http://www.citrusmuseum.com/서귀포감귤박물관) 서귀진 주변에는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사용하지 않는 진(鎭) 아래의 목장을 나눠주고, 조 8섬지기 분량에 대하여는 세금을 감면하였으며, 성 동쪽에서부터 수로를 파서 물을 이끌어와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1841년 9월 22일. 서귀진을 점검하기 위해 행차했던 제주목사 이원조는 새벽에 노인성을 기다리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서귀진에 머물며 문 열기를 기다리는데, 밤새 내린 비 그치니 노인성이 비추었네. 기성이 형산에서 서로 바라보니, 하늘이 나그네를 위해 무병장수 빌어주네.”(제주일보 2010.05.25.)


증보탐라지에는 "서귀진은 본래 동면 홍로천(烘爐川) 위 뱃도랑가 일대에 있었는데 1589(선조22)년 겨울 목사(牧使) 이옥(李沃)이 서귀포구로 옮겨 축성했다.

성 주변 둘레가 820척, 높이가 12척이고, 서쪽과 남쪽으로 두 개의 문이 있다. 성내에는 객사(客舍)와 별창(別倉) 및 군기고(軍器庫), 그리고 사장(射場)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이곳 서귀진성에 오르면 남극의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거니와 이를 영주십이경의 하나 서귀진노인성(西歸鎭老人星)이라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제주의 방어유적 114∼115쪽)


전체적인 모양은 서귀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긴 직사각형이고, 둘레 약 2,500m, 높이 약 3.6m이며,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객사·진졸청·병기고·창고 등이 있었고, 성 북쪽의 구서귀(舊西歸) 지역에는 말들을 사육할 때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잣담(목마장과 목마장을 구획하는 경계에 쌓았던 담장)이 있다.

성문 밖의 북서쪽에는 활 쏘는 연습장이 있다. 1695년 목사 이익태가 제작한 《탐라십경도》 중 서귀진을 보면 병기고만 기와지붕이고, 나머지는 모두 띠(새)로 지붕을 이었다.(http://www.citrusmuseum.com/서귀포감귤박물관)


그러나, 진 주변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단지 빈민 어호(漁戶)가 몇 호 있었을 뿐이어서 진이 고독함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성 밑에 있는 폐목장(廢牧場)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조 8석지기에 한하여 영구히 감세조치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떠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 성 동쪽 정방연(正方淵) 상류의 물을 당기어 관개시설로 논밭과 옥토를 만들고 동성(東城)으로 수로를 만들어 식수로 사용하고 서문 밖으로 방출하였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진졸청(鎭卒廳, 3칸)과 무기고, 창고, 사정(射亭) 등이 있었다. 영주12경(景) 중에 서진수성(西鎭壽星)은 이곳 서귀진에서 춘분과 추분에 남쪽 하늘 끝에서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고종43년(1906) 서귀진이 일본에 의해 폐지되면서 일제(日帝)의 서귀순사분파소(巡査分派所)가 설치되었고,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 초기까지도 건물 3동과 성담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일본군 관청으로 행정을 보았으며, 환곡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그 일부는 일본인들이 식민(植民)하면서, 1917년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부지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 4·3사건이 발생하자 이곳의 성담을 헐어 마을을 방어하는 축성용으로 사용하였고, 이후에는 주거용 건축 용도와 ‘밧담’으로 무분별하게 훼손되어, 지금에는 당시의 성담이었던 담들이 ‘우잣담’과 ‘성굽담’으로 일부 남아 있다.

서귀포경찰서와 남제주군교육청으로 사용되었고, 서귀경찰서는 1963년 서홍리로 이전하면서 민간인에게 불하되었고, 교육청 자리는 서귀여자중학교 부지로 사용하다가 1965년에 서귀동 284-7번지로 이설하면서 역시 부지는 민간인에게 팔았으므로 지금은 민간시설이 들어섰다.(제주의 방어유적 114∼115쪽)

현재는 보호면적 7,835㎡로 서귀포시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2010년2월 현재 서귀진성 터는 100% 사유지 매입이 완료된 상태이다.(제주의소리 2010.2.23.)


2000년 서귀포시가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해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원진의 탐라지 기사에 나오는 물도랑(溝渠)이 1935년 지적도에 표시되어 있으며 그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2009년 12월29일부터 2010년 2월16일까지 실시된 서귀진 1차 발굴조사에서는 조선시대 건물지와 방고래 시설 등을 확인하고 명문기와, 명문동전 등이 출토됐다.

2010년 6월 14일 2차 발굴조사 중에는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조선시대 중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만든 저수지 흔적이 확인되었다.

‘서귀진’ 2차 발굴 작업에서 그동안 문헌으로만 확인됐던 16~19세기 건물지 2동과, 정방폭포에서 물을 끌어와 진성 안에서 사용했던 우물터와 수로가 확인됐다.

직선거리 약 1km 내외의 위치한 정방폭포에서 수로를 연결, 이를 해결해왔던 것으로 보인다.(제주의소리 100624) 또, 서귀동 711, 713, 717, 720번지 일대에서 자연경사면을 이용해 축성 가능한 대지상의 단애 흔적을, 서귀동 714번지 일대에서 건물지 성토층과 18세기 기와와 도자기 편 등 당시의 문화층을 확인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석축에 대해서는 '지형단애층에서 성벽으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를 확인했지만 현재 성벽으로 보이는 석축 상부는 모두 파괴되어 성벽의 잔재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제주일보 2000년 6월 13일) 서귀포시는 1998년부터 주민설명회를 갖는 등 2002년에는 서귀진성 복원을 마칠 계획이었으나(제주일보 1998년 12월 24일) 현재까지 복원은 되지 않았다.


왜적 방어를 위해 바다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솔동산' 위에 서귀진성을 축조하면서 당시 선인들은 성 안에서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정방폭포 원류인 정모시에서부터 이곳까지 1200m 구간의 물길을 열어 관개수로를 축조하였다. 바로 그 수로가 성안에서 물을 가두어 사용했던 저수지와 함께 발굴된 것이다.

발굴된 수로는 매우 정교하게 축조되었고 수로 위로는 돌 덮개를 씌워 성안 군사들이 활동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수도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끌어온 물을 저장하였던 나무로 만든 작은 사각형 저수지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그동안 서귀진에 관한 문헌기록과 일치한다.

저수지 밑바닥에서는 당시 침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 일부가 발굴되었다. 조선조 도내에는 제주목성, 정의 대정현성과 서귀진 등 3성9진이 있었으나, 진성을 해체 발굴하기는 서귀진이 처음이다. 또한 성안에서 식수용 저수지가 발굴된 것 또한 처음 있는 일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400년 전의 선인들의 수로공사에 대한 공법과 물을 이용한 식수와 논농사의 관개 과정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제민일보 100621) 2012년 3월에는 서귀진 사적화를 위해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철거를 완료했다.


서귀진에서 노인성을 바라보는 모습은 자못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영주12경에도 ‘서진노성(西鎭老星)’이라 하여 서귀진에서 노인성을 바라보는 모습을 승경으로 꼽았다.
《작성 061124, 보완 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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