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상태바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8.12.23 17: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하프올레걷기)온평-신산리 3코스(b)는 돌과 바다의 아름다운 조화
 

두 번째 걷는 제주올레.

반씩 나눠 걸으며 거의 다 돌고 추자도만 남은 상황에서 보니..

3코스의 해안도로를 따라걷는 b코스를 가지 못한 것 같아 지난 22일 친구 고광언과 함께 이 바닷길 올레길을 따라 걸었다.

최근 올레꾼으로 함께 나서고 있는 고광언은 지난 주에 국회로 가서 공로패를 받고 돌아와 마약관련 입법화가 진행중이라며 잘 될 것 같다는 희망을 말했다.

이주영 국회부의장과 나경원 대표 등이 참석해 입법화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둘이 온평포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50분.

3코스 b코스는 바다를 따라 걷는 코스라 초보올레꾼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여정이다.

올레3코스는 김영갑갤러리로 가는 a코스와 바닷길을 따라 걷는 b코스로 나뉘어져 있다.

나는 힘든 코스를 걷는다고 a코스를 먼저 걸었기에 b코스는 잠시 잊고 있었다. 나름 다 걸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날 걸어보니 걷기로는 처음 가보는 코스였다.

날씨는 흐렸지만 간간이 햇빛도 비쳤고 다행스럽게도 걷는 동안은 맑은 날씨에서 걸었다.

올레걷기가 끝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니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올레3코스(b코스)는 돌과 바다가 함께 조화로움을 자랑하는 빛나는 길이다.

반짝이며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는 바다와, 길게 늘어선 용암돌과의 교류가 지속되는 길이었다.

온평에서 신산리까지 이어진 환해장성은 올레코스마저 이 돌길을 따라 해안길을 걷도록 되어 있어 돌길까지 마음껏 걸을 수 있었다.

그런 길이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온평 환해장성길을 지나니 신산 환해장성이 이어서 나타났다.

신산환해장성 이곳은 본지가 지난 2014년 6월 "아름다운 환해장성,포크레인 삽질 파괴"라는 제목으로 문화재인 이곳을 파괴하는 내용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후 신산 환해장성은 원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장성이 만들어져 버렸다.

 
 
 
   
 
 
 

가는 내내 온평리 지역은 원형 그대로인 환해장성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1998년 1월 7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9-9호로 지정)된 곳인 지를 의심할 정도로 마음대로 돌을 갖다 쓴 흔적이 남아 있었고 주변 양식장에서 공사를 하며 드나들었던 듯 일부 파괴된 모습이 아쉬움을 주었다

이곳 온평환해장성은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의 기록(환해장성)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곳이다

고려 원종11년(1270) 김수, 고여림이 삼별초의 입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해안선 300여리에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김수, 고여림이 제주에서 생존한 기간(1270년9월 입도, 11월 삼별초 이문경 명월포로 상륙, 금덕전투에서 김수 전사, 송담천전투에서 고여림 전사)으로 보면 그 때 시작은 했다

해도 완성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고, 조선시대 헌종11년(1845) 겨울 권직 목사가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쌓았다고 하니 현존하는 환해장성은 이 때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산포를 중심으로 해서 서귀소(消)까지 이르는 곳곳에 해안 성곽이 축성되어 있는 바, 완전하게 원형이 남아 있는 것은 없고 거의 반파 또는 유실된 상태이다.

성벽에는 약 20m 간격으로 방어초소와 유사한 한 변의 길이가 2m정도의 정사각형의 석곽이 있다. (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347쪽)

온평-신산 부근 해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약 2Km이며, 현재 온평리 환해장성에 보이는 석곽은 전경초소에서 경계근무용으로 시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회곽도(廻廓道, 성 안쪽에 붙여 만든 폭 2m, 높이 1m 정도의 段처럼 된 보초 근무 중 왕래하던 길)의 흔적이 약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으나 최근 일부 주민이 골재용으로 환해장성의 돌들을 실어다 써 버린 일이 발생(제주신문 1996. 8. 23.)하여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 고 지적하고 있다.

 
 
 

고희범 제주시장은 제주포럼C 공동대표를 할 때 쓴 ‘돌 속에 숨어있는 제주의 문화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제주의 돌. 사방을 둘러봐도 흔하디 흔한 돌. 땅을 파도 파도 끊임없이 나오는 돌. 거대한 암석에서 잔 돌에 이르기까지 돌은 제주인의 삶과 제주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문화재청이 별방진을 복원했으나 고증을 전혀 따르지 않아 성곽의 기본적인 기능도 갖추지 못한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다. 적의 침입을 막는 "미석"이나 적의 화살을 피하는 동시에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여장"도 없이 돌로 벽만 쌓아놓은 것이다. 그것도 돌을 정교하게 깎아 당시의 성곽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만들었으니 이를 "복원"이라 할 수 없다”며 우려를 전한 적이 있다.

고 시장은 이 글 말미에 “복원은 철저한 고증에 따라 그 시설물이 갖추고 있던 기능과 외형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이어야 한다. 비록 그 길이는 짧지만 원형이 잘 보존된 화북진을 보면 실제와 복원됐다는 성곽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언젠가 성곽을 다시 허물어야 하게 생겼으니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환해장성은 제주해안을 둘러싼 일종의 성벽으로 잘 지켜야 할 문화유산인 것이다.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는 환해장성을 일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부르고 있을 정도로 의미가 큰 곳이다.

그러나 훼손되거나 방치되거나 버려지거나 등등의 요인으로 그 존재가치가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제주도 곳곳에 만들어진 환해장성은 왜구를 방어할 목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민들이 강제동원돼 손으로 완성한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이지만 당시 주민들의 그런 아픔 따위는 지금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다.

척박한 제주도를 지켜 온 선조들의 고통의 시간을 이 환해장성은 묵묵히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제주환경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 둘씩 사라지고 죽어 없어지고 나면 제주에 남아있을 것이 무엇일까라는 걱정도 생긴다.

 
 
 
 

제주도 해안가 약 120㎞에 걸쳐 축조된 환해장성은 제주도의 자연해안선이 251㎞이라고 볼 때 거의 섬 절반에 걸쳐 방어벽으로 구축됐다.

지금은 온평, 행원, 한동, 동복, 북촌, 애월, 고내리 등 14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전한다.

더욱이 온평리나 신산리의 경우 최근 제2공항 건설문제로 뜨거운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곳이다.

여전히 제주제2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깃발이 걷는 내내 바닷길을 따라 나부끼고 있었다.

일종의 소리없는 아우성이다.

이 깃발은 바람에 흔들리며 주민들의 절규를 전하는 것 같아 가슴아픈 현장이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니 이 제2공항 건설도 "찬성파와 반대파가 둘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심각한 곳은 온평리이지만 지금 신산리 주민이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현실의 문제를 잘 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2공항이 만들어진다는 계획지는 이곳 해안도로와는 조금 위쪽이라 해안도로는 남아있을지 모르지만 호젓한 중산간지역이 개발되는 일은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처럼 우리가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제주환경은 아무도 보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보전지역을 불법으로 개발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점이 더욱 절박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제주환경의 가치를 높일 때 제주도의 가치도 높아질 것이지만 지금 원희룡 제주도정은 그런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23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이다.

‘만약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는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외롭고 가장 겸손하고 가장 조용한 철학자였다.

(중략)..

스피노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포루투칼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유대교단 소속의 학교에서 히브리어와 성서 등을 공부하였으나, 나중에는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갖고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이때 데카르트 철학사상 등에 영향을 받아 성경과 조상의 학문을 비판함으로써, 1656년 유대교단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당시 파문 선고는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는 사실상의 노예상태로의 전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를 파문한 교회의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추방한다. 낮에도 저주받고 밤에도 저주받으며, 잠잘 때에도 저주받을 지어다. 나갈 때도 저주받을 것이며 들어올 때도 저주받을 지어다. 주께서 그를 결코 용서치 마옵시고 주의 분노가 이 사람을 향해 불타게 하소서. 주의 노여움이 지금부터 그의 머리위에 임하여 그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로다.

(중략)..이제 각자에게 경계하노라. 누구나 입으로 그와 말을 주고받지 말며, 글로써 그와 의사를 주고받지 말도록 하라. 누구든 그를 돌보지 마라. 아무도 그와 한 지붕 밑에서 살지 말라. 아무도 그가 있는 에르렌 거리의 근처로 접근하지 말 것이며, 누구도 그가 입으로 전했거나 글로 쓴 문서를 읽지 말 것이로다’

참으로 가혹한 선고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고문에 개의치 않고 편견없이 사물을 직시하려고 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을 지키며 순정 무구한 정신으로 독선적인 교회 세력의 압력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에 이르는 일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험담도 나의 신념을 꺾지 못할 것이며 나를 위험 속에 처하도록 하지는 못할 것이다”

파문을 당한 후 스피노자는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고립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지성개조론’을 저술하였고, 이어 1663년에는 ‘데카르트의 철학원리’를 출간하였다. (중략)..그리하여 그가 6년후에 익명으로 출간한 것은 ‘신학정치론’이었는데, 이것 또한 출판되자마자 곧 금서목록에 올라 판매가 금지되었다.

(중략)..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정치론’은 표지가 개장되어 여러 곳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스피노자의 이름은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략)교양과 지위가 높는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함께 생활비가 보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는 줄곧 안경렌즈 손질하는 일만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다. (중략)..

스피노자의 이러한 고독한 생활은 그로 하여금 일체의 선입견으로부터 초연한 정신의 독자성을 지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정신세계 속에서 모든 사물의 실체를 신의 여러 가지 형태로 보아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정의하며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중략)..

스피노자가 죽은 뒤, 후일 그의 묘비에는 독일의 작가 노발리스가 평한 대로 ‘신에 취한 무신론자 바뤼흐 스피노자’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1882년 스피노자 사망 2백주년을 맞아 헤이그에서는 그의 기념상 제막식이 있었는데, 그때 프랑스의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은 마치 그가 살았을 때 감당해야 했던 파문 선고문의 저주와 불명예를 회복시켜주기라도 하는 듯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발표하였다.

‘이 온화한 사상가의 조상에 모욕적인 언동을 하며 지나가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 그러한 무리는 모든 천한 자와 같이 천하다는 것과, 신성한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의하여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이 화강암의 대좌 위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행복에의 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영원토록 이곳을 지나는 교양 있는 나그네들은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마 여기서 신의 참다운 모습을 가장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중략)..신의 중심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도 ‘신에 취한 무신론자’란 묘비명을 갖게 된 스피노자의 신념의 승리이자 진리를 사랑하는 그의 삶의 승리이다. 그의 부동심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 앞에 경의를 표한다.

 
 

 

     
 
 
 
 
▲ 올레꾼이 된 고광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