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서문밖..일도2동 민속자연사박물관내돌하르방(돌할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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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서문밖..일도2동 민속자연사박물관내돌하르방(돌할으방)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1.0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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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 기원설’, ‘제주도 자생설’, ‘몽골 유풍설’ 등 세 가지 설 거론

일도2동 민속자연사박물관내돌하르방(돌할으방)
 

제주도민속자료 제2호(1971년 8월 26일 지정)
위치 ; 제주시 일도2동 996-1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마당
유형 ; 석상
시대 ; 조선(1754) 추정

▲ 민속자연사박물관_돌하르방
▲ 민속자연사박물관_돌하르방

국내·외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돌하르방’이란 명칭은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근래에 생겼다. 돌하르방은 그 석상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여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리던 명칭이 1971년 8월 26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돌하르방은 ‘돌로 만들어진 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그렇다면 원래 돌하르방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사실 돌하르방이란 명칭이 대표성을 띠고 사용되기 이전에는 다양하게 불려 제주도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은 확실치 않다.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돌영감, 수문장, 장군석, 동자석, 망주석, 옹중석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이러한 명칭들은 석상의 형상, 또는 기능이나 신앙적 의미에서 붙여진 듯하다. 그중에서도 우석목, 무성목, 벅수머리, 완옹중의 석상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옹중석이라는 이름이 많이 통용되었으나, 우석목이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이었다고 한다. 옹중석은 완옹중의 석상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명칭들은 제주도의 삼읍이었던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등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르게 사용되었다. 즉 우성목은 제주목에서, 무성목은 대정현과 정의현에서, 벅수머리는 정의현에서 불렸다. 옹중석은 문헌에는 드러나지만, 민간에서 통용된 예는 확인되지 않는다.


돌하르방의 다양한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석상이 어떤 연유로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남방 기원설’, ‘제주도 자생설’, ‘몽골 유풍설’ 등 세 가지 설이 거론되고 있으나,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고 논쟁 중이어서 여전히 정확한 정설은 없다.


그런데 돌하르방의 제작 시기의 경우, 김석익(金錫翼)의 『탐라기년(眈羅紀年)』(1918)과 담수계(淡水契)에서 펴낸 『증보탐라지(眈羅誌)』에 의하면, 돌하르방을 옹중석이라 하여 1754년(영조 30)에 당시 제주목사 김몽규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진시황 때의 거인 장사로서 흉노족 등을 물리쳤던 완옹중(阮翁仲)의 석상을 수호신격으로 제주목 성문 앞에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 숙종·영조 연간에 제주에는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리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많았다. 그중에는 원귀가 되어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어 김몽규 제주목사가 동·서·남 삼문 밖에 옹중석을 만들어 세우고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돌하르방이 성곽과 관계가 있다는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할 경우, 이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1754년에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제주도는 1416년(태종 16)에 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었고, 얼마 후에 각 도읍지에 성곽이 축성되었는데,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돌하르방이 세워졌다면 그 이전에는 성문 앞에 돌하르방과 같은 석상이 전혀 없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돌하르방에 대해 인류사적이고 민속적인 각도에서 타당한 유래를 찾아내는 것은 널리 문화인류학적 조명을 거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돌하르방은 제주 선인들이 역사적인 시련과 자연과의 투쟁 속에서 적응하고 순응하면서 살아온 진취적인 인간상을 대변해 주고 있는 탐라 수호신과 같은 존재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돌하르방은 왜 세워졌을까]


오랜 세월 동안 제주를 지켜온 돌하르방이 왜 성문 앞에 세워졌으며, 주요 기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그 역할이 육지부의 장승과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승은 전국적으로 분포된 민간신앙의 한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마을, 사찰, 성문에 세워져 마을의 수호신 역할,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 표지 및 이정표 구실을 하는 사람 모양의 목상이나 석상을 말한다. 이러한 장승은 솟대, 돌무더기, 신목, 서낭당 등과 함께 동제(洞祭)의 대상 신으로 주술, 종교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돌하르방의 기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첫째, 돌하르방은 제주목 성문 입구에 서로 마주보게 배치되어 성안을 지키는 신상으로서 문지기, 수호, 방어의 역할을 지님으로써 마을과 주민들의 안녕과 융성을 지켜주며 기원하는 수호신적 기능을 가졌다. 이는 무덤 앞에 세워진 동자석의 기능과 같은 맥락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정낭을 걸쳐놓은 것으로 보이는 구멍이 조각되어 있는 예로 보아 수문신장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칭상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을 ‘벅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벅수’는 육지부에서 ‘장승’을 일컫는 말로 장승과 돌하르방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마을의 경계에 세워져 방사의 기능을 지녔던 거욱대와 같이 악귀의 침범과 재난의 피해를 막아주거나, 아이를 못 낳은 여인이 밤에 몰래 돌하르방의 코를 쪼아서 빻아 먹으면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속신과 관련하여 유추해 보면 주술 종교적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속신으로 인해 코가 마모된 돌하르방이 많다고 한다.


셋째, 성문 밖에 세워졌다는 것은 주현성(州縣城)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위치 표지 및 성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경계 표지 기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외부인들의 성문 출입을 제한하는 금표적 기능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돌하르방은 육지부의 장승이나 거욱대의 변형으로 제주도 특유의 종교와 문화를 표현한 석상으로, 특히 당시 하층민들은 돌하르방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면서 지나갈 정도로 신성시하였다고 전해진다.


[사회적 변화 속에서 돌하르방은 어디로 옮겨졌을까]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제주시의 돌하르방은 일제강점기 및 도시 개발에 따른 제주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몇 차례 옮겨지는 수난을 당해왔다. 제주시의 돌하르방은 원래 위치에서 모두 이전된 것으로, 몇 기가 어디에 세워져 있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실태는 파악하기 힘들다.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만 해도 돌하르방은 제주목 동·서·남 삼문과 북수구문 밖에 28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삼문 밖에는 좌우로 4기씩 마주보며 모두 8기가 세워져 있었고 북수구문 밖에는 4기만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돌하르방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시가지 발달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보존되지 못한 채 무단으로 옮겨져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다. 따라서 그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강경희)

여기 있는 돌하르방은 서문 밖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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