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총살명령 거부..하모리 문형순(文亨淳)서장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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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총살명령 거부..하모리 문형순(文亨淳)서장공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1.14 22: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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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첫 영화극장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해

하모리 문형순(文亨淳)서장공덕비

 

위치 ; 대정읍 하모리 짐개동산. 예로부터 이 곳에 김가(金家)가 살았다 하여 제주 사투리로 김가를 짐개라고 부른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유형 ; 비석(공덕비)
시대 ; 대한민국
관련 ; 4·3사건

▲ 하모리_사삼위령비와공덕비(

이곳에는 1996년 모슬포지역 주민들에 의해 마련된 위령비와 공덕비가 나란히 서 있다. 4.3이 발발해 죽음의 광풍이 온 섬을 휘저었던 당시 억울하게 희생됐던 주민들을 추모하는 위령비와 함께 그해 11월 학살의 문턱까지 내몰렸던 모슬포 주민 백여명을 살려낸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 그리고 문형순(文亨淳) 경찰서장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이다.

1948년 4.3이 발발하자 군과 경찰, 그리고 서청은‘산사람’들과 연루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고 학살해 나가기 시작한다.

군과 경찰은“자수하면 살려준다”며 주민들의 자수를 강요했으나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 광풍은 모슬포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군과 경찰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산사람’들이 부모요 형제요, 이웃인 탓에 그들에게 쌀 한 줌, 옷 한 벌 안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모슬포가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집 식구 중에 산에 올라간 사람, 산사람에게 식량이나 옷을 갖다 준 사람들은 자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수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느 누가 앞장 서 자수하겠습니까.

그러나 군과 경찰은 ‘명단’이 있다며 주민들을 협박했습니다. 자수할 수도,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바로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리장)이 나섰습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이 문형순이었는데 두 분이 문 서장을 만난 것이죠. ‘주민들은 아무 잘못도 없다.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자수시킬 테니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죠. 문 서장은 두 분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조 목사는 문 단장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공회당에 모이게 한 후 ‘마을 사람들이 다 죽게 됐다. 자수해야 산다. 이제 내 말을 안 들으면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요동을 치며 핏물이 흐르게 됐다. 명단이 (경찰에) 다 들어갔다’며 주민들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100여명의 주민이 조 목사와 민보단장의 말을 믿고 경찰서로 줄을 지어 자수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 역시 산사람들에게 쌀을 날라준 경험이 있었고 주민들과 함께 ‘왔샤(시위때 외치는 구호)’도 했었기 때문에 죽을 걸로 알고 경찰서로 간 것이죠”(대정읍 하모리 80세 고춘언씨의 증언)

100여명이 경찰서로 가자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서청대원들이었다. 총과 죽창으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죽였던 서청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잘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사찰주임이 우리를 보자마자 ‘전부다 빨갱이들이다. 다 쏴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청이 우리들의 조서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영락없이 죽게 되는구나 생각했죠 그 때 문 서장이 나타나 서청들에게 호통 쳤습니다.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냐. 다 나가라. 자수하러 온 사람들이다. 전부 나가라’며 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는 조 목사와 문 단장에게 ‘이들을 민보단으로 데리고 가서 자수서를 써 오도록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고춘언씨 증언)

문 서장은 조 목사와 문 단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을주민들의 조서를 마을서기에게 쓰도록 했다. 경찰이나 서청대원이 조서를 받는다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그는 재치를 발휘해 마을서기가 자수서를 받도록 한 것이다. 주민들끼리 말을 맞추고 의논해서 아무런 탈이 없도록 쓰도록 한 것이다.

“마을 주민들끼리 공회당에서 모여 의논했습니다. 무엇 무엇은 쓰고 또 무엇 무엇은 쓰지 말자고 했죠. 또 입도 맞췄습니다. 조금이라도 흠이 될 만한 내용들은 전부다 뺐죠. 그렇지 않고는 전부 다 죽게 됐기 때문에 쉽게 입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고춘언씨 증언)


다음은 당시 산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모슬포경찰서로 피신해 경찰과 함께 생활했던 마을 주민 이병연씨(89·대정읍 하모리)의 이야기다.


“마을주민들이 자수서를 들고 경찰서에 찾아오자 서청단원들이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문 서장이 다시 말했죠. ‘자수한 주민들이다. 강요하지 말라. 때리지도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 때문에 아무 탈 없이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며칠 후 주민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갔으나 민보단 자수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은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전부 주민들을 돌려보냈고, 100여명의 주민들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던 게 소위 ‘자수사건’이었다. 문 서장은 또 이 당시 경찰이나 서청단원들이 마을주민들을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경찰이 ‘누구누구는 산사람과 내통했다. 또 누구네 자식은 산으로 올라갔다’고 이야기 하면 문 서장은 ‘왜 말을 함부로 하느냐. 그 말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조사해서 사실이 아니면 너를 처벌하겠다’며 오히려 경찰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 때문에 모슬포 주민들은 밀고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이병언씨 증언)

선량한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문 서장의 행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문 서장은 모슬포에서 성산포 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자’를 검거할 것을 지시했고, 예비검속에 붙잡힌 사람들은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예비검속으로 마을마다 수백명씩 전도적으로 수천명이 다시 희생됐다. 모슬포 ‘백조일손’ 사건은 대표적인 예비검속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1950년 8월 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성산포경찰서장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공문을 보냈다. 김두찬은 이 문서에서 “귀서에 예비구속 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해서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이에 의뢰함”이라며 총살집행을 명령했다.

그러나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전쟁상황에서 계엄사령부의 총살명령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 문서에는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履行)’이라는 문 서장의 서명이 들어있어 군의 총살명령을 문 서장이 거부했음을 보여줬다.

1950년 8~9월 경 제주도 전역에서 수천명이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면 지역의 예비검속자들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던 문 서장의 ‘용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성산포경찰서 관할지역에서 예비검속으로 희생당한 사람은 모두 6명이었다.

그러나 이는 문 서장이 불가피하게 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읍·면별로 수백명씩 죽음을 당했던 다른 지역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성산면 지역은 거의 온전할 수 있었다.

모슬포 주민과 성산포경찰서 관내 주민들의 생명의 은인인 문형순 서장은 일제치하 만주지역에서 일본과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로 알려지고 있다. 4.3사건 발발 직후부터 종료직전까지 제주에 상주하면서 4.3사건 진압의 책임을 맡았던 지휘관 중 김익렬 9연대장을 제외하고는 최경록 11연대장, 송요찬 11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모두 독립군을 탄압했던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었다.

일본군 출신인 이들이 제주에서 선량한 양민들을 상대로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할 당시 독립군 출신인 문형순 서장은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희생을 조금이라고 막기 위해 모슬포 주민들을 보호했고, 성산포경찰서장 당시에는 계엄사령부의 예비검속자 총살명령까지 거부한 것이다.

처음에는 문형순이 근무하던 모슬포경찰서에서도 무고한 양민이 죽었다 하여 그의 공덕비를 세우는 데 반대하는 주민이 있어서 문서장의 공덕비는 세우지 못했다가 2003년에 새로 세웠다.

모슬포 주민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성산포경찰서장을 끝으로 경찰을 퇴임하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게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퇴직 후 제주시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장사가 안 돼 가게를 넘기고 제주의 첫 영화극장이었던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상태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민일보 2005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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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2022-01-06 15:20:01
조남수 목사님 김남원 민보단장님 그리고 문형순경찰서장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항상 우리 국민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지키시던 그마음에 존경을 표시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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