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야간조업 길잡이..애월리 도대불(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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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야간조업 길잡이..애월리 도대불(변형)
  •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1.15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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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도대불은 지금처럼 견고하지 못했고, 형태도 많이 달랐다"

애월리 도대불(변형)

 

위치 ; 애월읍 애월리 포구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어로신호유적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 애월리_도대불(1990년대).
▲ 애월리_도대불

애월포구 해안도로변 안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도대불이 있었다. 1930~1935년에 축조되어 불을 밝혀 야간조업 선박의 길잡이를 담당하였으나 전기가 들어온 후 사용되지 않았다.

제민일보(20130921)에 따르면 도대불의 규모는 하단 142㎝, 상단 116㎝, 높이 246㎝로 축조되었었다.

원래의 도대불은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현무암을 이용하여 중간 이하는 사다리꼴, 중간 이상은 사각기둥 형태로 축조하였다. 즉, 밑에서 허리 부분까지는 급격히 오므라져 있고, 상단부까지 같은 너비를 유지하며 축조하였다.

바른층 쌓기 방식을 이용하였고, 하단부에만 속채움을 하였다. 윗부분에는 불을 켜는 도구를 넣기 위한 시설이 있었다.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벽돌을 쌓듯이 축조되어 간단하면서도 튼튼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한 쪽 면에는 불을 켤 때 올라가기 편리하게 계단을 만들었다.

도대불은 마을 진흥회에서 관리했으며 등화시에는 석유 등피를 이용하여 불을 밝혔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1993년 주변에 해안도로가 생기면서 해체되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애월리 포구의 도대불은 1930년대 당시 애월어업진흥회장을 맡았던 고 김봉하씨가 자비를 들여 마을 어업인들과 함께 쌓은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바다와 삶을 함께 하며 어부들에게 생명과 희망의 불빛을 전해주던 도대불은 전기가설로 등대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윗부분의 불을 켜는 도구가 훼손됐고, 원형이 사라진 채 방치돼 오다가 1999년 현무암의 부서진 부분에는 정확한 고증 없이 시멘트 재료로 보수되었었다.


애월리(이장 박충열) 주민 및 애월항개발추진위원회(위원장 김관진) 회원들은 당시 도대불의 불을 켰던 등대지기 생존자와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고증자료를 수집, 2003년 11월 애월항개발추진위원회가 복원작업을 실시했다.

도대불 복원에는 첫 건립자인 고 김봉하씨의 아들로서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김인식씨가 1000만원을, 애월읍사무소가 5000만원의 사업비를 보탰다.(제민일보 20031215)


지금의 도대불은 하부기단과 몸체, 지붕으로 구분돼 있다. 본래의 돌은 하나도 안 남기고 새 돌을 깎아 날이 서게 쌓았다. 모양도 다르다.

하부기단은 높이 69∼100㎝, 폭 485∼508㎝로 측정됐다. 몸체는 높이 298㎝, 하부 폭 202∼206㎝, 상부 폭 137∼147㎝다.

불을 켜는 지붕의 규모는 높이 68㎝, 폭 86∼92㎝다. 이 도대불의 전체 높이는 466㎝로「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에 실린 도대불의 규모보다 220㎝ 가량 더 크다.


1938년생으로 옛 도대불에 불을 켜는 일을 마지막으로 했다는 강항윤씨는 "15살 때까지 도대불에 불을 켰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당시에는 배급받은 호롱불을 사용했고, 일당으로 생선 한 마리를 받았다"고 말했다.

또 "옛 도대불의 모습은 지금처럼 견고하지 못했고, 형태도 많이 달랐다"고 증언했다.(제민일보 130921)
《작성 061214, 보완 1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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