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나병환자 고쳐줘..조천리 기건목사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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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나병환자 고쳐줘..조천리 기건목사기념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1.30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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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 끝에 비석처럼 생긴 돌이 걸리자 당국에 신고

조천리 기건목사기념비
 

위치 ; 조천리 봉소동 강영묘역 내
시대 ; 현대
유형 ; 기념비

▲ 조천리_봉소동강영묘역내기건목사비


강영의 묘는 함덕 지경에 있다고 되어 있을 뿐 수백년간 실묘(失墓) 상태로 있었으나 1950년 우연한 기회에 묘를 찾게 되었다.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 끝에 비석처럼 생긴 돌이 걸리자 이를 당국에 신고하였고, 전문가들의 감정 결과 그 돌은 강영 묘에 넣었던 지석(誌石)임이 밝혀진 것이다.

지석에는 피장자의 이름과 그 글을 쓴 사람의 이름도 있었는데 지석을 쓴 사람은 제주목사로 근무하던 기건(奇虔)이었다.


기건(?∼1460)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행주, 호는 청파(靑坡), 고려 때 신돈(辛旽)의 일당인 현(顯)의 후손이다.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뒤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는데,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 3년 동안 한번도 먹지 않았고,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년(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이 유약함을 기화로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하였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였으며, 공론의 보장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세조가 다섯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청맹(靑盲)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기건 목사는 1443년(세종25) 9월에 발령받아 12월에 신처강(辛處康)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제주목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주민이 전복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제주의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불필요한 지방 관제를 없애고 해양 방어 체제를 개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지어 환자 100여 명을 수용하여 고삼원(苦蔘元)을 복용시키고 바닷물로 목욕시키자 거의 치료되었다.


1445년 12월예 첨지중추(僉知中樞)로 전출되어 떠난 세칭 명환(名宦)이라고 일컬어진 사람이다.

세종30년(1448)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역시 선정을 베풀었고, 세종31년(1449)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며,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개성부유수를 지냈고, 단종1년(1453) 대사헌이 되었으며, 인순부윤과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묘소와 신도비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에 있으며, 1986년 고양시 향토유적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숙종23년(1697)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에 있었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위패가 모셔졌다.

강씨 문중회에서는 조상의 묘에 지석을 써 주어 묘를 찾는 데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강영의 묘 오른쪽 앞에 기건 목사에 대한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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