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요, 경험 없는 사고는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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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요, 경험 없는 사고는 공허하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9.02.10 0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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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표선해수욕장-토산2리사무소,맑고 깨끗한 바다가 이어지는 코스
 

제주올레 4코스의 시작은 표선해수욕장에서 시작된다.

올레걷기는 제대로 한번, 거꾸로 반씩 나눠 두 번째를 모두 걷고..

이번 주부터는 다시 세 번째 제주올레 하프코스 걷기를 4코스부터 시작했다.

 

지난 9일 토요일은 제주시는 봄을 시샘하듯 날씨가 너무 안 좋아 과연 올레길을 걸을 수가 있을까를 걱정했다.

하지만 고광언과 함께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 제주 남쪽 표선의 날씨는 화창했다.

이곳에서 3번째 올레수첩을 구입하고 3번째 올레길 걷기의 스타트를 하는 첫 스탬프를 찍었다.

 

날씨도 표선까지 가는 도중 번영로 구간에서만 날씨가 궂었지 우리가 걸었던 4코스 바다는 걷는 내내 맑고 깨끗했다.

 

이날 11시 20분경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해 출발스탬프를 찍고 있는데 우리에게 다가와 올레코스를 묻는 이가 있었다.

얼굴에 마스크를 쓴 묘령의 여성이었다.

“4코스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를 물었다.

“파란색 표시를 따라가면 된다”고 말하고 “우리도 4코스를 걸으니 함께 걷자”고 했다.

 

그렇게 셋이서 걷기 시작했지만..나는 뒤로 처지는 바람에 다시 그 여자의 얼굴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다만, 걸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니 혼자보다는 역시 둘이 걷는 모습이 보기가 참 좋았다.

츄리닝 차림으로 나타난 여인..

바람이 세찬데 잘 걸었을지 모르겠다.

 

고광언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서울에서 내려와 서귀포의 한 게스트하우스애 머무르고 있으며 올레는 혼자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순간의 만남이었지만 올레에서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반갑다.

 

표선해수욕장에서 토산2리 사무소까지 이어지는 4코스 하프올레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형색색 색깔과 빛을 달리하는 아름다운 바다가 이어진,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코스다.

이날 따라 바람은 역으로 불어와 나중에는 거의 뒤로 걷다시피 해야 할 정도로 강도가 센 바람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코스는 작은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는 물론 바위가 해안가를 점령한 바다 등..

그야 말로 바다색깔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코스였다.

 

처음 이 길을 걸을 때가 문득 기억이 났다.

지금은 옮겨졌지만 당시 중간 스탬프를 찍는 곳을 지나쳐 지친 몸을 이끌고 한참을 되돌아오기도 했고, 횡단도로 앞 올레 말 표시를 불법주차한 차로 인해 보지 못해 한참이나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아련한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 4코스다.

 

4코스를 걸을 때는 늘 사진을 많이 찍게 된다.

어느 곳을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가 계속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번에 4코스를 걸으면서 발견한 또 하나의 묘미는..

본지에 오름이야기를 연재하는 본지 객원기자이기도 한 밝은이 홍병두 기자가 특허까지 받은 해안올레길인 ‘탐모라질(길)’을  만들고 있는 현장이 포착됐다.

곳곳에 나부끼고 있는 이 탐모라질 표시는 바다를 좋아하는 올레꾼들을 위해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일반인들의 조그만 후원을 받아가며  바닷길을 따라 이를 기획하고, 본지 객원기자인 우상준 기자와 함께 이를 해내고 있는 중이다.

 

여행업을 하는 홍 기자와 함께 두 사람은 시간만 나면 탐모라질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오는 3월이면 모두 완성될 예정인 해안올레길인 탐모라질은 앞으로 바다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을 부르고 동네를 살리는 계획까지 만들어놓고 착착 진행중이다.

탐모라질 리본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은 또 한번 제주도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훌륭한 기획이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 오늘도 홍 기자는 탐모라질을 만들기 위해 홀로 해안을 누비고 있을 그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홍 기자 우 기자 파이팅..

 
 
 

제주올레길을 두 번 돌고 나서 느끼는 것은 제주올레는 언제나 위대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핑계 삼아 제주도 전 지역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기회이지만..

생각지도 못할 곳에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다닐 수 있게 만든 제주올레의 그 업적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하기만 하다.

 

올레길은 건강과 힐링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늘 함께 하는 소중한 길이다.

소소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를 만나고 소통하게 한다.

그래서 그 길에서 만나는 아주 작은 이야기도 올레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수많은 말을 더할 수 있는 소재가 된다.

 
 
 

인생을 달관한 사람도..

달관을 꿈꾸는 사람도..

올레길에서는 이미 그길을 가는 그저 나그네로 남을 뿐이다.

 

다음에 또 그곳으로 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그 길을 이어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올레는 단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걷고 또 걷고

그리고 또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올레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추운 겨울철에도 숲속에서, 또는 올레길에서 만나는 올레꾼들이 있다.

반드시 올레를 걸어야 하는 사람들..

 

날씨나 어떤 이유가,

그들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올레를 걸어본 사람들은 잘 안다.

 

한번 올레길을 만나면 누구도..

그런 올레길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제주올레길이 참으로 위대하고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이유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스물 다섯 번째로 소개한 인물은 임마누엘 칸트(1724-1804)다.

 

철학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에게로 흘러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위의 말은 임마누엘 칸트의 사상이 서양 사상가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표현이다.

장차 독일은 물론 세계적 철학자가 될 임마누엘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마구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청교도적 신앙심이 강한 어머니의 감화를 받으며 성장했다.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들어간 그는 철학, 수학, 물리학 등을 배웠고, 특히 뉴턴의 자연과학에 깊이 심취하였다. 졸업후 약 10년간 가정교사로 전전하다가 모교의 강사를 거쳐 논리학 및 형이상학 교수가 되었는데,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1781년 근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서인 ‘순수 이성 비판’을 발표하였다.

그는 철학과 세계관이 종래의 신 중심적 형이상학 개념에서 인간 중심의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비판 철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확립했다.

그의 선험적 비판 철학은 오랫동안 대립되어 온 경험론과 합리론의 양대 조류를 근대 자연과학을 기반으로 하여 용이주도하게 비판하고, 인간 인식능력의 타당성과 함께 한계를 명백히 밝힘으로써, 유럽 사상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요, 경험 없는 사고는 공허하다’는 그의 말은 이른 바 경험론과 합리론을 융화 증류하는 대표적인 주장이다.

(증략)..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학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규칙적인 생활과 원칙론자로도 널리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는 코만으로 숨 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걸을 때에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가 고용하지 않은 마차에는 절대로 타지 않는다는 원칙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엇이건 완전한 것을 좋아해서 웨스트민스터 다리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히 말할 수 있었다. (중략)

칸트는 80세 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가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규칙적인 습관 이외에 금욕적인 식생활이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아침에 식사를 단지 두 잔의 차와 파이프 담배 한 대 만으로 대신했으며, 저녁 식사는 아예 하지 않았다. 차는 아주 적은 찻잎에서 우려낸 그야말로 묽은 차였으며, 파이프 담배는 동시에 식욕감퇴제로 이용하였다.(중략)..

그리고 그는 아무리 심한 병에 걸려도 하루에 두 알 이상의 약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병을 피하기 위해 약을 과다하게 복용하다 죽은 어떤 사람의 묘비명을 즐겨 언급하곤 했다.

“누구누구는 건강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 건강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여기에 누워있다.”

(중략)..그러나 그도 천명을 어찌할 수 없어 1840년 2월 결국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 위대한 인물을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저택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하인이 입술에 흘려주는 포도주를 잠깐 맛보고 “Est ist gut!(좋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간소한 장례식을 원했던 그의 뜻과는 반대로 성대한 장례식이 베풀어졌다. 시내의 모든 교회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종이 일제히 울려퍼지는 가운데 발인되었다.

(중략)..묘비에는 그의 유명한 말, “나에게 항상 새롭고 무한한 경탄과 존경을 불러 일으키는 두 가지는 별빛 반짝이는 하늘과 내 마음속 도덕률이다,”라는 말이 새겨졌다.

뭔가 알듯하면서도 철학적인 말인 칸트의 묘비명은 사실은 그의 뚜렷한 주장을 담고 있는 실천 이성 묘비명이다.

소망하거나 염원하는 것 만으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선(善)은 언제나 조건과 희생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칸트가 무조건적인 선의지(善意志)를 배격하고 실천 이성을 우위에 둠과 동시에, 마음속의 도덕률을 별빛 반짝이는 하늘과 동일선상에 놓고 경외시한 것은 인간의 자율적 도덕성과 이성적 의지가 곧 선(善)에 이르는 길이며, 자유에 이르는 길임을 밝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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