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힘차고 숭고한 천재의 마력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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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차고 숭고한 천재의 마력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9.02.19 0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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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올레4코스, 토산2리-남원포구는 봄날처럼 따뜻했다
 

 

올레꾼이 또 한사람 더 늘었다.

제주올레 4코스의 반을 걷는 하프올레걷기는, 지난 17일(일요일) 토산2리사무소 앞에서 남원포구까지 이어졌다.

제주시는 춥고 바람이 부는 날씨가 계속 됐지만..올레를 걷는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광언은 “오후 1시까지는 돌아와야 한다”며 길을 나섰고, 이날 삼양에서 난전 선생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다.

이날은 전날부터 올레를 꼭 같이 걷고 싶다던 난전 강법선(난과 생활 발행인) 화백과 셋이 함께 토산을 향해 떠난 길..

제주시는 바람이 불고 추웠지만, 토산을 지나 남원포구로 가는 해안도로는 참으로 맑고 깨끗한 바다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래도 올레길을 몇 번은 걸어보았다는 난전 선생은 “제 모습을 잃고 너무나 바뀌어가고 있는 제주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며 바다를 접한 해안길의 부숴져가는 용암돌들을 ‘보물’이라고 아까워했다.

 

제주에 내려와 살려고 결심하기까지 오랜 시간 고민도 많이 했을 난전 선생은, 우리나라 수묵화인 사군자 그림의 경지를 이룬 독보적 인물로, 집에 오는 손님에게는 꼭 차를 대접하곤 한다.

서울에서도 찻방을 갖고 있던 난전 선생의 찻방은 누구나 꼭 한번 방문해서 차를 마시고 싶어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울에서는 “난전선생 찻방에 가서 차를 마셔본 적이 있느냐”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난전 선생은 제주에 내려와 집을 꾸밀 때도 우선 먼저 차실을 만들어 놓고 짐으로 가득 한 방안에서 차부터 마시게 했다.

그 정도로 차에 대한 사랑이 차고 넘친다.

사군자는 물론 다도에 일가견이 있고 한시와 서예까지..다재다능한 실력을 자랑하는 선생은 요즘 제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까지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제주에서 처음 시작한 일이 올레를 걷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우리와 가장 먼저 걷기로 했던 것..

차에 올라 약 1시간 정도 토산2리로 가는 동안 난전 선생이 20대에 겪었던 캬바레 입성기가 참 재미있었다.

 

당시 수산직 공무원이었던 그는 춤꾼이었던 군대동기를 공직에서 만나 춤을 일주일 정도 배우고 인천에 있는 캬바레로 처음 출동(?)을 했다고 한다.

춤이 서툴러 그냥 앉아 있는데 웨이터가 오더니 “저쪽 여자분이 춤을 추자고 한다고 전했다”는 것.

그는 “춤을 못춘다”고 하자 “그래도 괜찮다며 한번 잡아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총각 때고 처음이라 어색하게 춤을 추긴 했는데..서툰 춤 실력으로 춤을 춘다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이후 춤은 포기하고 앉아서 술만 마시고 있는데,,옆에 있던 한 남자가 자기 자리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 시작된 이야기...

“직업이 무엇인가요..?”

“지금 공무원입니다.”

“공무원이 이런 데를 왜 옵니까..? 여기 다니는 남자들은 모두 오후 5시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토요일에는 2시가 되기만을 기다리지요. 그들은 아무도 직업이 없어요..오직 춤을 추기 위해 여기에 오지요..”

...

“여자들은 이곳에서 그런 남자들 중에 한사람을 골라 제비로 키웁니다.. 캬바레는 남자가 항상 부족하니 여자들이 남자쟁탈전을 벌일 정도인데..질투심이 강한 여자들은 다른 여자와 춤을 추지 말라고 그 남자에게 돈을 줍니다..남자 하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지요..그렇게 제비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다가 남자가 배신을 하게 되면 그 돈을 꼭 갚게 만듭니다..캬바레에서 만나는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나중에 부인이 생겨서 혹시 춤바람이 나게 돼 이곳에 오게 됐다면 다리를 분질러 버리세요. 남자는 몰라도 여자의 춤바람은 절대로 잡지 못합니다..”

이어진 이야기..

“춤은 여자들에게 처음 본 낯선 남자와 몸을 부비게 만들고 춤을 추다보면 환각작용이 일어나 중심을 잃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번 춤에 미치면 눈에 봬는 게 없어지지요..아직 젊으신데..제비가 될 생각이 있나요..?”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 왜 앉아 있나요..?”

“저는 가야겠네요..”

“이곳에서 나가야 하겠지요..”

“네..”

“그럼 나가세요..”

난전 선생은 하마트면 제비가 될 뻔한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당시 그 전문적인 제비는 문밖까지 나와 “잘 가라고 배웅까지 해주었다”며.."그날 이후 춤을 끊고 다시는 한번도 캬바레 근처에는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던 고광언은 “부부가 함께 춤을 추어도 결국 이혼을 하게 되더라”며 이에 화답했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중에 출발점인 토산2리 사무소에 도착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첫 시작이 들길이라 걸을 만한 것이 좋았다.

돌고 돌아 들길을 다 걸어나오니..길은 다시 해안도로와 연결이 된다.

해안도로에는 홍병두 기자가 만들어가고 있는 해안올레길인 탐모라길 리본이 계속 바람에 날리고 있어 또 반가웠다.

이제 거의 다 완성돼 가고 있을 해안도로 전용 올레길이다.

아마 바다를 좋아하는 올레꾼들에게 큰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걷는 도중..

그렇잖아도 뒤에 처져 있는데..

카메라 용량이 다 찼다는 메시지가 떠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중간에 앉아 아무리 용량을 늘리려 해도 늘릴 수가 없었다.

 

사진 찍기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

다시 호젓한 곳에 앉아 이것 저것 눌러보다가 용량이 많은 파일을 보니 동영상이 몇 개 찍혀 있어서 이를 모두 제거했더니..다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이후 사진을 찍어가며 많이 뒤쳐진 상태에서 부지런히 두 사람을 쫓아갔지만 앞서 간 둘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둘은 종점에 거의 다 도착할 시간인데..

남원포구가 거의 가까운 정도의 거리에 왔을 때 전화가 왔다.

“해안도로 중간 팔각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화였다.

부지런히 걸어 가는 동안 날씨가 다시 푸근해졌다는 걸 느꼈다.

아침과는 달리 따사로운 봄 날씨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셋은 다시 함께 만나 조금 더 걸었고, 곧 이날의 종착점인 남원포구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날은 걷기를 많이 서둘러서였는지 2시간 30분 정도를 걸었다.

고광언 말로는 이날 “1만3천보 정도 걸었다”고 말했다.

제주에 살면서 처음 걸어본 올레길을.. 다 걷고 나서 난전선생은 말했다.

“하프 코스는 불편하지 않고 시간이 넉넉해서 좋다만..나는 후에 고행의 길로 올레길을 걸어보려 한다”는 뜻을 전했다.

“하루에 한 코스가 아니라 2코스까지도 계속 해서, 힘들게 고행을 하듯 그렇게 걸어보겠다”는 것이었다.

도인 같은 난전 선생이기에 가능한 말이라 그의 올레길 행보에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 궁금해진다.

이날 우리 둘은 부인의 독촉전화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고광언을 먼저 내려주고 삼양에서 순두부로 맛있는 점심을 했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다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아더 쇼펜하우어’(1788-1860)다.

 

훗날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가 되는 니체는 스물 한 살 때인 1865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을 연구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한 권의 책을 펴들고 잠시 시간을 잊은 듯 그 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는 그 때의 감격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혼령이 책을 가지고 빨리 돌아가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책을 사서 마치 도망치듯 서점을 뛰쳐 나왔다. 집에 도착하기 바쁘게 가지고 온 책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그 힘차고 숭고한 천재의 마력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의 보물이었다.”

니체는 14일 동안 침식을 잊고 그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의 감화를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책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쇼펜하우어는 평범한 은행가인 아버지와 활동적인 문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아버지의 권유로 상업을 시작했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괴팅겐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과 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교분이 있던 괴테 등에 영향을 받았지만 어머니와는 뜻이 잘 맞지 않았다.

쇼펜하우어의 인간에 대한 경멸은 그의 포괄적인 염세주의에서 비롯된다. 물론 그의 사유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염세주의는 그의 고난의 삶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는 널리 명성을 얻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세인들의 평가 사이에서 고뇌하였다.

스스로 천재라고 자처했던 그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멸시를 염세주의로 확립해 나갔다. 1819년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했지만, 전혀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그의 이 저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니체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략)..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하자 쇼펜하우어는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직장도 없이 오직 조그마한 삽살개 한 마리만을 데리고 고독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서재에는 칸트의 상반신 초상화와 청동불상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맹목적인 삶의 의지’로 보고 이성은 이 의지의 시녀로 보았다. 따라서 생명은 단지 살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며, 악의 술책으로서 고의 세계일뿐만 아니라 가능한 세계 중의 최악의 세계라고 하였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의 의지를 철저히 끊고 관조의 세계인 예술과 종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중 가장 좋은 예술로는 음악을, 가장 좋은 종교로는 불교를 꼽았다. 그리고 정념, 동정, 청빈을 성자의 이상으로 삼았다.

한편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다음과 같은 특수한 집단혼을 모범적인 결혼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먼저 두 남자가 한명의 여인과 결혼한다. 그리고 그 여인이 나이를 먹으면 그 남자 둘은 다시 두 번째 부인으로 한명의 젊은 여인을 맞아들인다. 이런 결혼방식을 쇼펜하우어는 4명의 남녀가 결합하는 결혼이란 의미에서 ‘테트라가미’라고 이름 붙였는데, ‘테트라’란 그리스어로 4라는 뜻이다.

그러다 마치 음지식물 같던 그의 인생에 햇볕이 든 것은 1848년이다. 시민혁명이 실패하고 합리주의적 헤겔철학이 종언을 고함과 동시에 염세철학이 각광을 받으면서부터 그는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중략)..

성공과 더불어 명성이 찾아들자 그는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언론이 자기에 관하여 쓴 글이라면 빠짐없이 찾아서 읽었고, 차츰 의사표시에 있어서나 교우관계에 있어서 전과는 딴판으로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렇게 희구해마지 않던 명성과 경탄의 소리가 그를 감싸게 되었을 때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문에 드리워져 있었다.

1860년 9월21일,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냉수욕을 마친 뒤 식탁에 앉았는데 그로부터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심장마비였던 것이다. 그의 모든 재산은 유언에 따라 자선단체에 기증되었고, 고독한 페미니스트였던 그의 무덤 앞에는 다만 아무 말도 새기지 않은 검은 대리석 묘비가 세워져 파란 많은 염세주의 인생을 상징하게 되었다.(중략)..

생이 맹목적인 삶의 의지라면 인간과 만물을 창조한 신의 의지는 무엇일까..궁극적으로 허무와 맞닿아있는 인간의 의지는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묘비명은 그런 인간의 허무와 그 허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마지막 상징이다.(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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