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도 제염의 효시..종달리 염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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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도 제염의 효시..종달리 염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2.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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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 염전터의 변화는 제주도 1차 산업의 변화를 상징한다

종달리 염전터
 

종달리 염전 터
위치 ; 종달리 마을 동쪽 현재의 갈대밭 자리
유형 ; 생산기술 유적(염전)
시대 ; 조선∼대한민국

 
 

종달염전(鹽田)은 제주도 제염의 효시인 동시에 소금생산의 주산지였다.

한국수산지 제3집(1910)에 의하면 '조선 중엽 1573년 강려 목사가 종달리 해안 모래판을 염전 적지로 지목하고 이 마을 유지를 육지부로 파견하여 제염술을 전수케 하여 제염을 장려한 것이 제주도 제염의 효시'라고 적혀 있다.


김상헌의 남사록(1602)은 '강려 목사가 종달 해변의 노지를 보고 도민들에게 해염 생산법을 가르쳐 소금을 만들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00년대 종달리 마을 3백53호 가운데 1백60명이 제염에 종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가 46개가 있었다고 한다.

염전지는 현재 종달 동(東)동의 논밭이다. 제염에 참여하려는 인구가 대거 유입됐던 동동은 당시 '큰 동네'로 불리웠다.

주민들은 '접'을 만들어 제염을 위한 가마 구입이나 사용을 공동으로 대처했다. 염전조성, 해수운반, 연료채취 및 운반, 전오(煎熬) 과정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소금 판매에 나섰는데 판매인들을 '소금바치'이라고 불렀다. 이 곳 사람들을 일컬었던‘소금바치'라는 말은 이처럼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한데서 연유했다.

이후 하도리와 성산읍 시흥리 염전도 생겨났다고 전한다. 종달 천연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은 조정에 진상은 물론 전라도 지역까지 보내졌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종달 제염업은 해방후부터 육지부 천일염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수지를 맞추지 못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지금은 염전지가 수답(제2수답)으로 바뀌었다. 염전터를 수답으로 바꾸는 공사는 1957년부터 시작되어 격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 공사가 답보상태를 거듭한 끝에 1969년에야 32ha의 옥토가 만들어졌다.

이 사업은 제주도의 간척지 사업으로 성공된 첫 케이스다. 현장에 당시 도지사와 북제주군수에 대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한라일보 2003년 10월 24일 한라산 학술대탐사 169회)


당시 金仁和 북제주군수는 사업의 진두지휘를 위하여 날마다 종달리 현장에 나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기 때문에 '종달리군수'라는 애칭까지 얻었다고 한다.(지미의맥 79쪽)


마을 길에 있는 공덕비에는

“바닷물 밀려들던 옛날 갯벌이 황금빛 물결치는 옥답이 되어 풍년송 하늘 높이 울려퍼지니 높으신 그 은덕의 보람이어라.

이 기쁨 잊지 않고 언제까지나 자손만대 길이길이 간직하리라.

여기 버려졌던 넓은 갯벌에 영글은 벼이삭이 넘실거리고 보람찬 새 희망의 꿈을 이루니 높으신 그 은덕의 보람이어라. 이 희망 길이길이 언제까지나 자손과 더불어 간직하리라."

라고 새겨져 있다.

위 사진은 논밭으로 만들 때 바닷물을 막은 제방이고
아래 사진은 논의 현재 모습으로 갈대밭으로 변하였다.

갯벌-염전-논-갈대밭으로 변해온 종달리 염전터의 변화는 제주도 1차 산업의 변화를 상징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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