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무주리..월정리 원봉선생유적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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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무주리..월정리 원봉선생유적단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3.0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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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바라보면 마치 반달처럼 보여 월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월정리 원봉선생유적단비 元峯先生遺蹟壇碑
 

위치 ; 위치 ; 구좌읍 월정리 225-6번지. 구좌중앙초등학교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200여m 떨어진 곳
시대 ; 조선후기(비석 건립은 1936년)
유형 ; 비석(기념비)
크기 ; 높이 110㎝, 너비 43㎝, 두께 18㎝
재료 ; 대리석

 

 


비문은 다음과 같다.


〈元峰先生遺蹟壇碑〉
州治東六十里 環以大瀛 瀕以明沙 奇岩峭壁 錯列其上 名其地月汀者 我元峰張先生所遊止也 先生諱鳳秀字景實吾州人 淑氣所鍾天姿旣卓 孤貧力學夙著令聞 及遊松沙奇先生之門 得聞大道之要 凡經傳性命之奧 禮儀象數之繁 靡不窮搜博探 用賁厥躬 雖不得進爲 而施諸世 猶能刑于家而化于鄕 吾鄕之人 知親親而尊尊 往往有讀書自好者 寔先生之賜 而先生則沒 已二十有餘年矣 惟先生 平日 講論賦詠 多在月汀 至今 婦孺漁牧 猶指而相語 躑躅而不能去也 而況於親灸之者乎 於是 及門諸人 相與卜日 爲坍於此 因書其事于石 庶幾徵諸久遠 而來者可以想仰而興起也 竊惟峴山之於羊叔子 潮州之於韓文公 皆追思遺惠 以及乎其跡 而叔子以武功 先生以儒學 文公不能一峕 先生終其身而後已 以此視彼亦可以无愧矣 若先生族出行治之詳 具在狀誌 玆不復贅云 歲丙子冬十月 日 門人一同 謹竪

 

(〈원봉선생유적단비〉주치동육십리 환이대영 빈이명사 기암초벽 착렬기상 명기지월정자 아원봉장선생소유지야 선생휘봉수자경실오주인 숙기소종천자기탁 고빈역학숙저영문 급유송사기선생지문 득문대도지요 범경전성명지오 례의상수지번 미불궁수박탐 용분궐궁 수부득진위 이시제세 유능형우가이화우향 오향지인 지친친이존존 왕왕유독서자호자 식선생지사 이선생칙몰 이이십유여년의 유선생 평일 강론부영 다재월정 지금 부유어목 유지이상어 척촉이불능거야 이황어친구지자호 어시 급문제인 상여복일 위담어차 인서기사우석 서기징제구원 이래자가이상앙이흥기야 절유현산지어양숙자 조주지어한문공 개추사유혜 이급호기적 이숙자이무공 선생이유학 문공불능일시 선생종기신이후이 이차시피역가이무괴의 약선생족출행치지상 구재장지 자불복췌운 세병자동십월 일 문인일동 근수)


원봉선생유적단비


제주목 동쪽 60리에 큰 바다로 둘러있고 고운 모래로 된 물가에 기암과 절벽이 그 곳에 어지러이 놓여 있어서 그곳을 이름하여 월정이라 하니 우리 원봉 장선생이 노닐며 머물렀던 곳이다.

선생의 휘는 봉수이고 자는 경실이니 우리 고을(제주) 사람이다. 맑은 기운을 타고나서, 용모가 이미 빼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힘써 배워서 일찍 훌륭한 명성을 드러냈고 송사 기우만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함에 이르러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핵심을 터득하였다.

무릇 경전에서 논한 인간의 본성과 천명의 심오한 뜻과 예의(禮儀)와 상수(象數)의 복잡한 것들을 빠짐없이 찾고 널리 탐구하지 않음이 없어서, 자기 자신을 예(禮)로 훌륭하게 하였다.

비록 벼슬에 나가고 정치를 할 수는 없었으나, 세상에 자신의 학문과 예법을 베풀어 주신 것들은 오히려 집에서 본받고 마을을 교화(敎化)할 수 있었으니 우리 마을 사람들이 어버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받들 줄 알며 왕왕 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기는 사람이 있는 것은 진실로 선생의 은혜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것을 헤아려보니 이미 20년이 넘었다.

더욱이 선생이 평소에 강론하고 글을 짓고 시를 읊은 것이 대부분 월정에 있어서, 지금까지 아낙네, 어린이, 어부와 목동들조차도 오히려 지적하며 서로들 말을 나누어 발걸음을 머뭇거리며 떠날 수 없거늘, 하물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들임에랴! 이에 제자 여러 사람이 서로 함께 길일을 택하여 이곳에 단을 만들고 이어 돌에 그 일을 기록하니 징험이 오래도록 남아 후세 사람들이 상상하며 우러르고 감동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라노라.

가만히 생각하건데 현산 사람들이 양숙자(양호:羊祜)에 대한 것과 조주 사람들이 한문공(한유:韓愈)에 대한 것은 모두 남긴 은혜를 추모함이 그 발자취에 미친 때문인데, 숙자는 무공으로 하였으나 선생은 유학으로 하였고, 문공은 한 때에 그쳤으나 선생은 돌아가신 이후에야 그만두셨으니 이로써 저들을 비교해도 또한 손색이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가계와 행적의 자세한 내용은 모두 기록에 있으니 여기서 다시 장황하게 말하지 않는다. 병자년(1936) 겨울 10월 일 문인 일동 삼가 세우다.


참고 : 한유는 조주에서 직접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진사 조덕에게 명해서 스승(훈장)이 되게 하니 조주의 선비들이 문행(文行)에 독실해졌고 백성들에게도 그 효과가 미쳤다]라는 내용이 소식이 쓴 「조주한문공묘비」에 나온다.

원봉선생은 평생 월정에서 훈장을 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예법을 가르쳤다. 一㞱는 㞱(해가 지다 총)으로 보면 '하루해가 질 때까지'로 보고, 㞱을 峕(時의 古字)의 오기로 보면 一時(일시적인 것)로 해석해야 한다. 의역하여 ‘한 때에 그쳤으나’라고 하였다.

'원봉선생유적단비'는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원봉 장봉수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원봉선생은 원래 제주시 화북 출신으로서 1856년경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학문과 관혼상례법을 가르친 훈장이었으며 서적도 남겨 주었다.

그는 특히 제자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구조 개선에 열정을 쏟아 정신적 측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1850년대 이전에는 월정리의 이름이 무주리(武州里, 無住里)였다.

어느 날 밤 멸치어장이 형성되고 그는 테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달은 밝고 하늘은 맑았다. 그가 마을을 유심히 쳐다보니 무주리가 반월형(半月型)이었다.

그래서 원봉 선생은 '무주리는 그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바다에서 바라보면 마치 반달처럼 보여 월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월정(月汀)이란 마을 이름이 탄생했다고 한다.(북제주군 비석총람, 제주일보 1996년 11월 17일)


遺자의 글자가 부서져 훼손되었는데 이것은 4·3사건 때 생긴 총탄 자국이라고 추정된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곳이었는데 남쪽에 붙여 도로가 확장되면서 약 2.5m 정도 높은 곳이 되었기 때문에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비석 둘레에는 가로 430㎝, 세로 430㎝에 높이 80㎝, 폭 80㎝ 정도의 울담을 둘렀으며 남쪽으로 입구가 나 있다. 현재는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잡목과 가시덤불이 가득하다.
《작성 070306, 보완 1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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