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직접 체험하여 살아있는 지식에 도달하는 편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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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직접 체험하여 살아있는 지식에 도달하는 편이 훨씬 낫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9.03.10 2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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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위미항-쇠소깍까지 5코스 하프..특이한 올레길 이어져
 

 

남원포구에서 위미항까지 걸었던 지난 주에 이어. 지난 9일(토요일)에는 위미항에서 쇠소깍 중간다리에 있는 6코스 시작점이자 5코스 종점 포스트까지  약 2시간 30여분 가량 올레길을 걸었다.

들불축제가 열리는 기간중 이날은  들불을 밝히는 중요한 날인데 저녁에는 비가온다고 예보된 상태였다.

다행히 우리가 걷는 동안 비는 오지 않았지만 올레를 다 걸은 후 오후 3시가 가까워오자 비가 내리기 사작했다.

올해도 둘불이 활활 타는 모습을 보기는 이미 글른 것 같았다.

급기야 한 시간 일찍 들불을 태운다고는 했지만 비 때문에 이후 다음날까지의 모든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매년 둘불축제에 참여하기는 하면서도..

들불을 태우지 못하게 만드는 눈에 안 보이는 작용을 하는 것인지..

축제일 당일, 맑은 날을 만나기가 늘 쉽지가 않다.

 

이날 비가 오기 전 오전 중에 걷는 올레길은, 중간중간 마을을 지나기는 했지만 거의 바닷가를 직접 걸을 수 있는 제5코스는 특이한 올레길이 연이어 이어졌다.

밀물이지만 바닷가 돌길위를 걸어서 넘기도 했고, 작은 자갈이 깔린 해안길도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진 올레길이 쇠소깍까지 가는 동안 쉼없이 내내 이어져 지루함을 주지 않았다.

문제는 공천포에 도착했을 때 보이는 흉물스런 방파제가 눈에 많이 거슬리긴 했다.

기존에 놓여있던 경계표시물 위에 시멘트를 덧발라 더욱 높여놓은 방파제..

방파제 높이가 너무 높아 아름다운 바다경관을 볼 수 없도록 만들어놓아 실망감이 컸다.

 
 

얼마 전에 공사가 끝난 듯 공사안내판에는 재해예방시설을 한다는 안내가 돼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연을 배려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그런 공사였다.

실망감을 가득 안고, 이 길을 지나 망장포구로 들어섰다.

조그만 마을포구인 이 망장포는 처음 걸을 때는 그 모습 그대로가 참 아름다웠었는데..

얼마전 두 번째 걸을 때 보니 엄청난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포구는 흙탕물이 가득 했고, 입구는 막혀 들어갈 수도 없었다.

잠시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들어서니..

길을 조금 넓히고 계단을 두 개 만들어 놓았으며 예전에 오르막길에 있었던 기념비도 아래쪽으로 옮겨 그대로 놓아둔 모습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망장포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있는 그대로 옛 모습을 살리면서 잘 단장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자꾸만 사라져가는 제주도의 옛모습들..

개발이 좋은 것 같지만..

가는 곳곳..

아파트 단지가 만들어졌고, 고즈넉한 옛 모습의 제주마을을 점점 사라져가는 중이다.

남원과 위미지역도 이런 현상은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동네마다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호텔이나 아파트단지가 곳곳에 들어서 있었다.

이런 마을과 망장포구를 지나 쇠소깍으로 들어서는 입구로 가려면 가파른 예촌망이라는 동산을 올라가야 한다.

지대가 높아 옛날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해서 예촌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날 “불교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며 걷기를 서둘렀던 고광언은 쇠소깍에 도착하자마자 콜택시를 부르려고 했다.

남원과 서귀포시 몇군데는 “차가 없다고 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화를 했다.

지나가던 한 동네 아주머니가 "이 지점은 쇠소깍 중간다리라고 하면 다 안다"고 얘기해 줘 택시를 부르기가 좋았다.

전화를 걸기 시작한지 10여분 만에 서귀포 택시를 부를 수 있어 위미항까지 무사히 올수 있었다.

차에 타서 운전기사에게 물어보니..

"차가 없다고 했다"는 얘기에 “콜을 하면 서귀포시내에서는 누구든 가까운 곳에 있는 차가 올수 있는데..이상한 일”이라며 의아해 했다.

제주교통방송에 매주 출연하고 있는 고광언은 기사에게 “제주에서 방송되는 교통방송을 많이 듣느냐”고 물었다.

기사는 “서귀포지역에서는 그렇게 방송을 들어야 할 정도로 막히지는 않아 잘 듣지 않는다”며 “제주시로 갈 때는 교통혼잡지역까지 안내하는 내비를 찍어서 가기 때문에 교통상황을 파악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옛날 노래가 많이 나와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듣는 분이 많은 것 같다”고 전해주었다.

사실 제주에도 교통방송까지 생길 정도로 거리가 많이 혼잡해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은 여전히 초기 서울의 강남지역을 떠올릴 정도로 막히는 곳이 많아지긴 했다.

앞으로도 지속될 개발, 개발..

이렇게 개발만 하다가는 언젠가는 올레길이 막혀버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날 걸으면서 보니..

올레리본과 함께 해안올레길을 안내하는 탐모라질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지금 제주도는 리더가 아닌 지배자가 다스리는 곳처럼, 이미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제주도민은 앞으로 이런 독재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인생열전(박영만 저)가 다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하인리히 페스탈로치(1746-1827)이다.

 

스위스의 교육자인 페스탈로치는 사랑과 직관에 의한 새로운 교육방법으로 세계의 교육계에 혁신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났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언어학, 철학을 배우고 한때 스위스의 애국단체에 가담하여 애국심과 민주주의, 인도주의 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개조의 이상에 대한 꿈을 키웠으나, 루소의 ‘에밀’을 읽고 크게 감동한 뒤에는 농촌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후 1711년, 페스탈로치는 노이호프에 농장을 만든 다음 그곳에 농민학교를 세워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에 힘썼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농민학교가 실패하자 한동안 사색과 저술에만 열중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1798년 프랑스혁명의 여파가 스위스에까지 미치자, 슈란츠에 고아원을 개설하고 전쟁고아를 양육하는 동안 교육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부르크돌프와 이베돈에 다시 학교를 세우고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이념 및 교육방법의 실현에 노력하여 점차 교육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어린이의 능력을 자발적인 활동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고, 어린이의 입장에서 어린이에게 맞는 실질적인 교육을 실시해 왔다.

개인적인 암송학습보다는 진단학습을 중요시하여 그림 그리기 글쓰기, 노래하기, 모형만들기, 지도만들기, 체육 등 현장학습과 참여활동을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교육방법이었다.

또 인간성을 함양시킴으로써 사회개혁에 이바지할 일꾼을 양성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둠으로써, 이러한 이념은 신교육의 원류로 곧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략)..

1827년 페스탈로치는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1846년 1월12일 그의 무덤 앞에는 아주 의미있는 묘비가 세워졌다. 그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1746년 1월 26일 취리히에서 태어나 1827년 2월 17일 부르크돌프에서 숨진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여기에 잠들다. 노이호프에서는 가난한 자의 구조자, 라인하르트와 게르트루트에서는 시민들을 가르친 사람, 슈탄츠에서는 고아의 아버지, 부르크돌프와 뮌헨부후제에서는 새로운 학교의 창시자, 이베돈에서는 인류의 교육자, 참된 인간, 그리스도교도, 선량한 시민,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그의 이름에 은혜가 있기를!”

인간이 만믈의 영장일 수 있는 것은 선조가 후세를 교육하고 후세는 선조의 정신과 문화, 문명을 계승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후세를 가르침에 있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인간의 끊임없는 고민과 과제이다. 오늘날 제도화된 학교에서는 수업만 있을 뿐 교육이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페스탈로치는 이미 그 당시에 이렇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사실을 서둘러 기계적으로 암기한 탓에 단어의 포화상태가 되어 자유와 관찰력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스스로 배우는 능력이 가로막히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체험함으로써 천천히라도 살아있는 지식에 도달하는 편이 훨씬 낫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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