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해신제 제단..하귀리 조간대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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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해신제 제단..하귀리 조간대 고인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3.3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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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이 되려면 바닷물 속에도 만들었었는지 증명해야..

하귀리 조간대 고인돌

하귀리 조간대 고인돌(?)
위치 ; 애월읍 하귀리(동귀리) 관전동 해안 조간대

 

 

고인돌이라고 주장하는 돌은 동귀리(행정상 리명은 하귀1리) 조간대에 있다. 동귀리 일주도로변에 있는 〈바닷가에식당〉에서 보면 300°방향에 뭍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폭 50∼70m, 길이 200여m 정도로 보이는 넓은 조간대에 밑에는 주먹만한 크기에서 머리통만한 크기의 자갈이 깔려 있고 1∼2m 크기의 현무암 바위들이 산재한 평평한 지역이다.

직사각형과 오각형이 붙어 있는 모양의 상석은 장축 방향이 거의 동서(100°)라고 할 수 있고, 길이는 290cm, 짧은 쪽은 120∼160cm, 두께 50∼70㎝ 정도이며, 북쪽으로 약 5∼10°정도 기울어져 있다.

주변의 암석들과 같은 현무암으로 된 상석의 윗면은 풍화구가 가득하여 매우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폭이 가장 짧은 부분의 남쪽과 북쪽에 균열이 생겨 있고, 남쪽 균열이 생긴 옆에는 약간 깨어져 나간 자국이 있다.

밑면은 평평하고 매끈한 편이며, 서쪽 옆면은 밑면보다는 거칠지만 비교적 편평하고 매끈한 편이다.(2001년 5월 11일 제민·제주·한라일보는 治石된 상태라고 보도)

지석은 신문에서는 5개로 보도했는데 필자가 확인하기로는 6개의 아랫돌이 있었다. 5개는 상석의 가장자리에 하나는 서쪽 가운데 쪽에 받쳐져 있다.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 것부터 시계 방향으로 보면 길이-두께-높이가 각각 ①22-10-20 ②50-30-20 ③35-15-28 ④60-55-30 ⑤47-35-38 ⑥48-20-38㎝ 정도이다. 그 중 ④번 지석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박혀 있는) 돌이다. (2001년 10월 13일 답사)


2001년 5월 10일 발견된 이 고인돌은 전문가에 의하여 바닷가 조간대(밀물과 썰물이 생기는 곳)에 있는 것으로는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된 바 없는 유일한 것이며, 탐라국 형성기(기원후 100∼2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묘의 성격보다는 선사시대에 해신제를 지내거나 풍어를 기원하는 의식과 관련된 제단의 성격이 강하다고 판명하였다. (제민·제주·한라일보 2001년 5월11일)


그러나, 이 돌의 아랫돌이 기가 막힐 정도로 상석과 맞물려 있고 상석에는 치석(治石) 흔적이 있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인공적인 고인돌이라고 판단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작은 돌들 위에 큰 돌이 얹어진 상태에서 파도에 흔들리는 과정에서 아랫돌이 윗돌과 마찰되어 맞물린 모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모양의 돌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조천읍 북촌리 서우봉 북동쪽 해안에서 여러 개의 아랫돌과 하나의 윗돌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는 돌을 본 적이 있다.

조간대보다 약간 위쪽에 있는 이곳의 윗돌은 그 크기가 엄청나게 크고 모양으로 봐도 누구도 고인돌이라고 주장할 만한 돌은 아니다.

그리고 고인돌이 주로 만들어진 시기인 탐라시대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그 근거로 애월읍 금성리 일주도로변에서 발굴된 석축 유적이 배를 대기 위한 접안시설(接岸施設)이었다는 학계의 보고(금성리 석축유적 참조), 1700년대까지만 해도 산지천을 통해서 지금의 오현단 아래인 고령전까지 배가 드나들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고인돌이 만들어졌다는 탐라시대에는 이 돌이 아무리 썰물 때라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돌이 고인돌이라는 주장을 계속 하려면 고인돌을 바닷물 속에도 만들었었는지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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