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을 낳고, 존경은 존경을 낳고, 복음은 빛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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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을 낳고, 존경은 존경을 낳고, 복음은 빛을 낳는다.."
  • 고현준 기자
  • 승인 2019.04.04 0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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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올레6코스 쇠소깍-소정방까지..되찾아 더 아름다운 길이..
 

 

제주올레 6코스는 11.6km.

하프코스인 서귀포시 하효 쇠소깍에서 중간스탬프 포스트가 있는 소정방 폭포까지 가는 길이 참 멀기만 하다.

지난 3월16일(토요일)에는 친구 고광언과 함께 걷다가 제지기오름을 내려와 보목포구에서 점심을 먹고 예촌망 불법개발현장을 취재하느라고 중간에 멈췄다.

지난 3월31일에는 난전 강법선 선생과 다시 셋이 뭉쳤으나 종점까지는 가지 못하고 마흐니오름 환경훼손 취재 때문에 걷는 중간에서 돌아와야 했다.

3월 한달간 겨우 6코스의 반만 걸은 셈이다.

 

느리게 걷는 올레걷기는 말 그대로 천천히 걸으며 놀멍 쉬멍 걸어야 하는 것이 맞는 말일까..

우리 셋은 중간스탬프를 찍은후 정방폭포 주차장에서 백년초를 수십년간 연구하며 박물관까지 운영하는 김제국과 만나 다시 보목포구에서 자리구이와 갈치조림을 먹는 휴식을 선택해 버렸다.

얼마전 어머니 병원수발을 하느라 한달 이상 서울에서 생활하다 제주에 내려온 난전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올레는 언제 걷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지난 3월31일 고광언과 셋이 보목포구로 가는 길에  그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됐다.

난전선생의 군대이야기가 그의 사랑이야기와 함께 보목리까지 가는 동안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달변의 난전선생은 “내게 카바레 제비족이 될 뻔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고 알려온 친구가 있었다‘며 ”다음부터 자기 이야기를 쓸 때는 미리 얘기해주라“고 말했다.

"누가 그 글을 읽고 전해 준 뒤에야 자기도 그 이야기를 늦게 서야 봤다"며..(기자는 허락없이 난전선생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본의 아닌 누를 끼치고 있어 죄송스럽기만 하다.)

 
 

 

 

이날도 “요즘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 나도 한번 공부해 볼까 한다”는 얘기를 나누다가..

그렇게  군대이야기는 시작됐다.

난전선생은 당시 손금을 아주 잘 봤다고 한다.

중대장부터 사단장까지 손금을 잘 봐 줘서 군대생횔을 아주 편히 했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군대에 있을 때 약혼까지 했던 이야기까지..말을 얼마나 재미있게 끌고 가는지 그 말을 듣다보니 서귀포에는 금새 당도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

“이 모든 이야기가 다 소설감이야..”

그는 사랑에도 달인(?)이었는지.. 부인과 결혼을 하게 된 동기 등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편안히 전해 주어 고광언과 나는 즐겁기만 했다.

난전선생의 부인 정하연 여사는 난전선생이 사회활동을 하는 동안 여성들과의 차모임 등 모임이 잦아지자 유명한 명리학자를 찾아가 사주를 보았다고 한다.

그 명리학자는 정 여사에게 “남편의 사주에는 여자가 모래알처럼 많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곁에 여자가 많다하더라도 좋아하는 여자는 딱 한사람밖에 없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

그 후에 부인 정여사는 집으로 돌아온 후 안심하며 남편의 사회생활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됐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난전선생은 그 이후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수묵화 사군자의 대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내조는 남자를 크게 만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법이다 .

그런 점은 이날 함께 올레를 걸으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6코스 올레길에 송산동주민센터에서 만들어 놓은 느리게 가는 편지 겡이우체통이 보이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인에게 사랑의 엽서를 보내는 일이었다.

그는 그가 “부인에게 쓴 편지를 공개해도 좋다”고 했다.

 

“사랑은 홀로 있을 때

찾아오더이다.

바닷 길 바람이 열어

돛을 올리고

찾아가는 길

그대에게 가는 사랑길“

 

“서울에서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는 부인에게 제주올레의 기운을 보내주고 싶다”며 쓴 글이었다.

그 짧은 글 속에도 사랑이 넘쳤다.

 
 

함께 걷다보면 난전선생은 우리에게 많은 걸 배우게 한다.

올레는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수많은 인생들이 녹아있을 길이기도 하다.

언제는 시인이 됐다가, 갑자기 미식가가 되기도 하고, 용감한 탐험가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 셋은 올레길을 따라가다가 예쁜 바다가 보이면 바닷길을 따라 걸었다.

더 가까운 제주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난전선생은 늘 깊숙이 들어가도록 요구한다.

항상 내려가서 자세히 보자고 한다.

6코스의 중간에 있는 아름다운 소천지에서도 그랬다.

길이 있으니 한번 내려가 보자고 했는데,,막상 내려가 다시 보니 칼로 자른 듯, 날카로운 칼자국처럼 선명한.. 희한한 용암의 흔적과 만났다.

이곳에 널려진 기암괴석은 일종의 덤이었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한라산이 마치 소천지의 배경이 되는..

아주 멋진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 소천지였다.

그렇게 아주 가까이 더 다가가면 또 다른 세계가 보이는 법이다.

눈에 따라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동안 보아온 세상과는 전혀 딴판인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곳...

우리는 그런 다른 세상을 그곳에서 만나 보았다.

그러나 다음애 만난 소정방폭포는 공사중이라 들어가 보지도 못했고..

바닷가로 이어지는 서귀포 칼호텔앞 올레길이 다시 열려 그길을 지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다시 문을 연 파라다이스호텔 코스는 올레6코스를 더 훌륭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6코스가 제대로 이어진 느낌이다.

올레를 걷고 또 걷는다는 건, 우리의 인생과도 많이 닮았다.

끝까지 가 봤다 해도 또 살아 가야 한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다음으로 소개한 인물은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여러서부터 스코틀랜드의 독특한 가정환경, 즉 부모님의 돈독한 신앙심과 가난, 중노동 등을 체험하며 자라났다.(중략)

그는 25세 되던 해인 1838년 드디어 런던 선교회의 인정을 받아 처음에는 중국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으나, 아편전쟁 때문에 포기하고 선배 선교사인 로버트 모퍼트의 추천에 따라 아프리카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840년 11월 선교사로 임명된 리빙스턴은 그해 마지막 날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로 출발해 3개월 후인 1940년 3월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1940년만 해도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은 문명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다.

리빙스턴은 애초부터 탐험을 위해서 아프리카로 간 것은 아니었다. 예정대로 그는 기독교 선교사업을 벌이고 의료봉사를 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그러나 해가 거듭되면서 그는 여행벽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정글과 사나운 동물, 피에 굶주린 미개인, 만연된 질병 등이 그의 탐험을 어렵게 만들었다.

(중략)..그의 여행은 복음만을 전하러 다니는 사람들의 여행과는 달랐다. 그는 지도에 자기가 다닌 지방의 동식물, 지리,지질학, 그리고 자기가 목격한 의학적인 실례 등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를 런던에 있는 왕립지리학회에 보냈다. 리빙스턴은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 못지않게 과학을 실천하는 과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에서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의학적인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중략)...

또한 그는 다른 백인 여행자들과는 달리 원주민들에게 애정과 사랑을 느꼈으며, 원주민들도 그를 자기들을 돕는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찬양하고 존경했다.

리빙스턴은 함께 일한 선교사의 딸과 결혼하여 여섯 아이를 두었는데, 1850년 여행 도중 어린 딸이 죽자 가족들을 영국의 집으로 보내고 자신은 더 많은 아프리카인 가족들과 함께 하기위해 현지에 남았다.

그는 1849년부터 5년간 지리탐사를 계속하여 칼라하리사막을 횡단하고 이어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그후 1856년에야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자신이 위대한 국민적 영웅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중략)..

 

 

1873년 5월1일 아침, 치탐보마을에서 짐꾼들은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리빙스턴을 발견했다. 그는 머리를 두 손에 기댄 채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마을과 마을로 전해졌다. 기독교로 개종한 원주민들 수천명이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문명사회에서 특별히 그의 유골을 고국 땅에 묻을 수 있도록 먼 길을 운구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수만리 떨어져 있는 영국에서 리빙스턴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의 유해를 가져다 매장하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시신의 부패를 최소하하기 위해 심장과 다른 장기는 절단해 정중한 의식을 치른 다음 마을의 큰 나무 밑에 묻고, 그 나무에 리빙스턴의 이름을 새겨두었다.

이어 시신의 몸속에 소금을 채우고 얼굴에는 약품처리를 한후 시신을 뜨거운 햇살에 말린 뒤 옥양목과 질긴 삼베로 잘 싸서 시신이 습기와 더위에 노출되지 않도록 했다.

유해를 완벽한 미라로 만들고 난 그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마을에서 마을로 릴레이식 운반을 시작했다.

이렇게 운구행렬이 무려 9개월간 계속된 끝에 그의 유해는 잔지바르에 도착했고, 그들중 대표인 원주민 추마는 즉시 영국 영사관에 가서 자신들이 리빙스턴의 시신을 아홉달간 운구해서 여기까지 왔노라고 전했다.

놀란 영국 영사관측은 일행으로부터 유해를 인수받아 대기하고 있던 기선에 승선시켜 본국으로 수송했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의 성자로 추앙받던 리빙스턴의 심장은 그가 그토록 사랑한 아프리카 땅에 묻히고, 유헤는 영국으로 옮겨져 4월18일 스물 한발의 예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국장으로 예를 갖춘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정중히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아프리카의 성자, 흑인의 아버지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그의 봉사와 탐험을 끝내고 여기 잠들다. 당신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어둠 가운데 살았는데, 당신이 가신 후 우리는 빛 가운데 삽니다‘ 라고 새겨졌다.

리빙스턴의 최대 업적은 온갖 역경속에서도 인류애의 그리스도 정신을 실천했다는 점과 유럽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데 기여했다는 점, 그리고 과학적 접근방법으로 미지의 땅을 문명세계에 알렸다는 점 등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존경은 존경을 낳고, 복음은 빛을 낳는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리빙스턴의 주검에 대하여 표한 사랑과 존경은 마치 한편의 장엄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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