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려양식..김녕리 광산김씨입도조김윤조(金胤祖)방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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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고려양식..김녕리 광산김씨입도조김윤조(金胤祖)방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4.04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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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의 손이 미치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로 망명

김녕리 광산김씨입도조김윤조(金胤祖)방묘

 

제주도기념물 제 60-1호
위치 ; 김녕리 괴살메(묘산봉) 남쪽
유형 ; 무덤
시대 ; 고려

▲ 김녕리_김윤조비석(
▲ 김녕리_김윤조묘


광산김씨 제주입도조는 시조 김흥광(金興光)으로부터 17세인 김윤조(金胤祖)로 고려후기 김광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평장사 김승택의 딸이다.


형 흥조는 일찍 군기감을 거쳐 해주의 수령을 지내고 공민왕 8년 홍건적이 침입시 남행하는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 2등에 책봉된 인물이다.


김흥조(金興祖)가 김정(金精)·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재안(金齋顔)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주멸하기로 하고 그 준비를 서두르다 발각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가 장류되는 도중 우해(遇害)당한 것은 1368년 봄이었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김윤조는 신돈(辛旽)의 화를 피하여 개경을 떠나 1368년 가을 제주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장차 밀어닥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하기 위해 추적의 손이 미치지 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먼저 1270년 삼별초의 입도를 막기 위해 제주에 들어왔다가 전사한 김수(金須) 장군은 김윤조의 증조부(曾祖父)이며, 애월읍 고성리 산124번지 산간지역인 산세미오름에 김수묘로 추정되는 석곽방묘가 있다.


김윤조는 제주도에 들어와서는 김녕리에 터전을 잡고 훈학에 힘쓰는 한편 예의와 효도를 숭상하여 그 덕이 높았다.

김윤조는 만년에 거처를 한동리 쪽으로 옮겨 조(趙)씨와 같이 지금의 한동리 위쪽 속칭 감남굴을 개촌하여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따르는 제자들이 안장했다고 한다.

괴살메 남쪽에 있는 김윤조의 묘는 고려 양식인 석곽방묘(石槨方墓)이다.


1호묘의 규모는 전면 225㎝, 후면 205㎝, 좌측면 395㎝, 우측면 405㎝이다. 판석형 석곽은 정면 3매, 후면 2매, 양 측면 4매로 축조되었다. 세 모서리 판석 위에는 약 20-30㎝ 정도의 미석 흔적이 남아 있다.


2호묘의 규모는 전면 253㎝, 후면 247㎝, 좌측면 447㎝, 우측면 460㎝이다. 판석형 석곽은 정면 3매, 후면 3매, 좌측면 6매, 우측면 7매로 축조되었다. 전면 양단에는 아치형 정석이 남아 있으며, 후면에는 ‘V’자 형태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익의 門人으로 조선 인조 때에 문명을 떨친 김진용은 그의 9세손이다.(광산김씨제주종친회 홈페이지)


이 묘는 제주지방 기념물로 지정된 후 공원사업에 착수했고 매해 음력 3월 15일이면 제주의 일가들의 세일제(묘제)를 지낸다.
< 작성 200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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