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갯머리..세화2리(가마리) 남당(해신당)
상태바
[향토문화]갯머리..세화2리(가마리) 남당(해신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4.08 1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상안전을 기원하거나 풍어를 빌기 위해 큰 굿 벌여

세화2리(가마리) 남당(해신당)

 

세화2리 남당(해신당)
위치 ; 표선면 세화2리 생거리포구 앞
유형 ; 민간신앙(당)
시대 ; 조선∼

▲ 세화2리_남당전경
▲ 세화2리_남당_내부


표선면 세화2리는 행정상의 명칭일 뿐이고 흔히 가마리(加麻里)로 통한다. 가마리라는 리명은 속칭 '갯머리'(浦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표선면 세화2리의 潛女 노젓는 소리를 들어 보자.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해천영업 배운 놈아 어딜 가고 짜부러졌느냐 이물에 이사공아 고물에 고사공아 … (중략) … 뻥도라진 물막은 섬에 삼시 굶엉 돈벌어서 서방님 하루 술값밖에 모하여서 배가 고파 지은 밥이 니도 많고 돌도 많아 아이구 답답한 말을 누구한테 일러 주나 …(하략)"

이들 潛女와 어부들이 다니는 남당에는 마을 사람들의 당에 대한 신앙심을 말해 주는 일화가 깃들어 있다.

1940년경 2차 세계대전 당시 '반모루여' 지경에서 자리돔을 잡던 남편이 미국 공군의 피습으로 사망하게 되자 부인 고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억척스런 생활을 통해 돈을 모았다.

고씨는 갯머리 출신 교포들의 힘을 보태어 고향으로 돌아와 남당을 보수·증축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당을 파괴하게 되자 이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조상들이 세운 당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고 하여 신주를 몰래 숨겨 두었다가 해방이 되자 제 자리에 모셨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해상안전을 기원하거나 풍어를 빌기 위해 큰 굿을 벌이곤 했다.(제민일보 1993년 11월 23일)


당의 유래에 대해서는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안(安) 모씨라는 분이 매봉에 가서 속돌로 신주를 만들어서 당집(기와집)을 짓고 모신 것이 당의 시초라고도 한다.(가마초등학교 교육계획 12쪽)

그러나 지금은 당 안에 속돌로 만든 신상은 없다. 마을 분들의 말로는 속돌로 만든 것이 신상이 아니라 기와집 모양의 돌집(아래 사진)이라고도 한다.


이곳 배에서 일을 하고 있던 주민은 1970년대초까지는 '용굿'이라고 해서 큰 굿을 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2007년 3월 16일 대화)

당집은 특이한 구조의 건물이다. 일반적인 당집은 지붕에 물매를 주어 가운데가 높아지는 데 비하여 이 당집은 철근콘크리트 슬라브로 되어 있어 평평한 지붕이다.

얼핏 보아서는 당집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당집 내부에는 돌로 만든 지붕 모양의 갓돌을 덮은 시설이 있고, 그 속에는 지전, 물색, 명실이 걸려 있다.

주변에는 양초 등이 남아 있어 요즘도 신앙민들이 지속적으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닥에 깔았던 신문지는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것이었다.


모시는 신은 남당할으방과 남당할망이며, 제일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다. 제물은 돼지고기와 메 2기, 떡, 나물, 바닷고기 등을 쓴다.(남제주군 문화유적 산포 지도 209쪽 참조)

다음은 가마초등학교 6학년 한희주 어린이의 조사 내용이다. "특히 선주는 일 년에 한 번씩 남당에서 제를 지내는데 그 광경은 무당에게 돈을 주고 데리고 와서 사고 없이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신께 비는 것이다. 또한 주변 마을에서도 우환이 있을 때 무당을 데리고 와서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도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