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한라산 목장..가시리 갑마장(甲馬場) 잣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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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한라산 목장..가시리 갑마장(甲馬場) 잣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4.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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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장은 구경당금(舊耕當禁) 신정허경(新定許耕) 천(川) 임수(林藪) 갑마장(甲馬場) 간장(間墻)으로 구성

가시리 갑마장(甲馬場) 잣담
 

위치 ; 가시리 벵곳오름과 번널오름 사이
시대 ; 조선∼대한민국
유형 ; 목축 유적(목장 경계 담장)

 

▲ 갑마장하잣(
▲ 가시리_갑마장하잣근경세로

조선시대에 제주도에서는 국영목장을 운영하였다.

중산간 목장이 태동한 배경은 첫째, 방목하던 말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해안 지역에서 목초 부족 문제가 발행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삼림지에서 말을 방목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삼림지에는 목초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피서에 유리한 지역이므로 중산간 지역에 방목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중산간 지역을 개간 제한지로 묶어 목장지역으로 지정한 다음 이 지역에 주민들의 농경지 개간을 금지함으로써 안정적으로 목축지를 확보하려는 정책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 아래 1429년 제주도 출신 관료인 고득종(高得宗)은 목장을 해안에서 중산간 지역으로 이설하자는 주장을 했다.

즉, 〈한라산 변두리 사면 약 4식(120리) 되는 땅에 목장을 축조하여 공사(公私)를 가리지 말고 말을 들여보내 방목하게 하고 목장 안에 들어가게 되는 거민(居民)60여호는 모두 장외(場外)로 옮기게 하여 소원하는 대로 땅을 베어 주십시오.〉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수용된 뒤 1430년경부터 중산간 지역에 165리 규모의 잣담이 축조되면서 '한라산목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중산간 지역의 목장화는 삼읍 설치 후 1430년대부터 지역 주민들을 동원한 축성(築城)정책과 장내의 거주민들을 장외로 옮기는 이주정책을 통해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15세기말에 확정된 10소장의 근간이 되었다.

당시 목장의 규모는 1개 목장의 주위가 45∼60리였다. 1440년에는 제주목사가 3읍의 감목관을 겸직하여 제주도 전지역의 마정을 통솔하였다.

또한 국가 소유인 국마(國馬)와 주민 소유인 사마(私馬)를 국유지인 한라산목장에서 공동으로 방목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지역 주민들에게도 한라산목장 지대를 개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중산간 지역뿐만 아니라 산간 지역과 해안 및 도서에도 목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 비해 목장의 공간 확대가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중산간 지역에는 한라산목장인 10소장, 산간 지역에는 산마장(山馬場), 해안 지역에는 우목장, 도서 지역에는 우도장(牛島場)과 가파도 별둔장(別屯場)을 두었다.

10소장에는 천자문의 글자로 낙인(烙印)하여 군(群)으로 편성한 후 만든 자목장(字牧場)이 소장(所場)별로 분포하였다.

17세기 중반에는 중산간 지역에 11개 소장(所場)에 58개의 자목장이 분포하였다. 한 "소장"에 5~7개의 "자목장"(字牧場)이 있었는데 1개 자목장에는 암말 100필과 숫말 11필이 사육됐고, 자목장마다 군두 1명, 군부 2명, 목자(테우리) 4명이 배치돼 말을 관리했다.

조선후기 기록에 제주의 자목장은 모두 58~64개가 있었다고 하니 6천~7천필의 말이 국영목장에서 사육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653년의 《탐라지(耽羅志)》에 제주목 7개 소장에 38개 자목장, 정의현 3개 소장에 17개 자목장, 대정현 1개 소장에 3개 자목장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8세기로 들어서면서 목장 수는 5∼6개 증설되었으며 목장의 위치가 지도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704년에는 방만한 목장 운영으로 부실화가 나타나 중산간 목장에 대한 명칭통합과 공간재배치와 같은 정비 정책이 실시되었다.

마필 사육이 불량한 자목장은 버리고, 규모가 작은 자목장은 큰 목장으로 통합하는 정책에 따라 제주도의 삼읍에 분산되었던 자목장들이 10소장으로 통폐합함으로써 목장 운영의 효율화를 기하였다.


'잣'은 1974년 제주도의 지형도에 공식적으로 '잣성'이란 명칭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목마장의 경계에 쌓은 담장이다.

'잣담'은 해발 150∼250m 일대에 '하잣', 해발 350∼400m에 '중잣', 해발 450∼600m에 '상잣'이 만들어졌다.

하잣은 농경지와 중산간지대의 경계, 상잣은 말들이 목장 지역에서 삼림지대로 들어가 동사(凍死)하는 것을 방지할 목적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축성 시기를 보면 하잣은 15세기 초반, 상잣은 1780년대로 나타나고 있으나 중잣은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목사 김영수가 재임하던 1780년(정조 4) 각 목장에서의 우마(牛馬)가 분실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산장(山場) 경계를 축장했다.

군마(軍馬)와 민마(民馬)를 양축하는데의 번거로움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도내의 목장중 상장(上場), 침창(針場), 녹산장(鹿山場)을 통칭, 산장(山場)이라 하니 폭원이 2백리요, 23처에 물이 있다.

이 목장은 광활하여 한라산 정상까지 이르니 우마의 분실이 자주 일어나 우마 점검시에는 삼읍 남정을 징발, 그 폐단이 커서 횡장(橫墻)을 신축하고 문로를 개설하여 방목하고 겨울에는 가두어 폐단을 방지하니 축장의 길이는 1만 1천여보요, 높이가 4척이었다.(http://culture.jeju.go.kr/)

여러 곳에 나뉘어 있던 산마장들은 숙종 때를 전후하여 침장(針場), 상장(上場), 녹산장(鹿山場)으로 재편되었다.

침장은 조천읍 교래리 바농오름(552.1m) 일대, 상장은 조천읍 교래리 산굼부리(437.4m) 일대, 녹산장은 표선면 가시리 소록산(441.9m)과 남원읍 수망리 물영아리(508m)를 연결하는 초지대에 형성되었다.

산마장의 공간범위 내에는 침장, 상장, 녹산장으로 대표되는 상위 목장과 괴종장, 효생장, 몰마장, 장수물장, 갑마장으로 구성된 하위 목장 등 모두 8개의 목장이 있었다.


녹산장은 구경당금(舊耕當禁) 신정허경(新定許耕) 천(川) 임수(林藪) 갑마장(甲馬場) 간장(間墻)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서도 갑마장은 녹산장 내에서 동쪽 부분에 위치했다.

국가가 길렀던 말 중에서 품질이 가장 우수했던 갑마(甲馬)를 선정하여 별도로 이곳에서 방목한 데서 갑마장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현재 녹산장터에는 가시리마을공동목장과 제동목장 정석비행장이 위치하고 있다.(한라일보 2004. 04.02. 강만익 글)


하잣의 축조에 동원된 노동력은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었으며, 일정 범위를 할당하여 축성토록 하였다. 잣담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겹담'(굵은 돌을 두 줄로 쌓아 그 안에 잔돌을 집어 넣는 형태)이인데, 도순동의 상잣과 가시리 구두리오름의 상잣은 외담 구조로 되어 있다.


25,000분의 1 지도에는 병곳오름과 번널오름 사이의 잣담을 '하잣성'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1899년에 만들어진 〈濟州地圖〉와 가시리 향토지에 의하면 인근의 대록산과 따라비오름, 번널오름, 벵곳오름을 연결하는 일대에는 '갑마장'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근의 '녹산장'에서 방목되던 말 중에서 품질이 우수한 말인 '갑마(甲馬)'를 선정하여 길렀던 목장을 의미한다.(강만익 선생이 집필한 문화유산전문가 과정 '목축 문화' 답사 자료 3∼10쪽에서 발췌)

갑마장은 인근의 관영목장에서 진상(공마)을 위해 선정된 가장 우수한 말들을 일시적으로 그리고 집중적으로 먹이를 먹이며 길렀던 목장이다.


제주의 말 목축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김만일은 고향 의귀에서 교래까지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서 1만여필의 말을 키웠다.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자 선조 27년(1594) 군마로 쓸 수 있는 좋은 말 300여필을 국가에 바친 것을 시작으로 선조 33년(1600), 광해 12년(1620), 인조 5년(11627)까지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네차례에 걸쳐 모두 1300여필의 말을 바쳤다.

이 공으로 그는 인조 6년 종1품 숭정대부에 제수되고 헌마공신으로 칭송받게 된다. 이후 김만일의 개인목장은 "산마장"으로 운영되면서 산마장 관리를 위해 "산마감목관"제가 신설됐다.

그의 셋째아들 김대길이 초대 "산마감목관"에 임명된 뒤 그 후손들이 218년동안 임기 6년의 감목관을 세습하게 된다.


산마장에는 "갑마장"(甲馬場)을 두어 산마들 가운데서 골라낸 품질이 가장 뛰어난 "갑마"를 따로 관리했다. 이 산마장에서 기르던 말이 얼마나 됐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가시리에는 225만여평에 이르는 마을공동목장이 있고, 말을 방목할 때 경계를 나눴던 잣과 테우리(목부)들이 살던 테우리막도 남아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잣담은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서 1∼1.5m에 불과하다. 아마도 현대에 들어서면서 경작지로 바뀌는 과정에서 담 높이가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거의 직선으로 보이는 잣담이 수백m 이어져 있다. 사진의 왼쪽에는 번널오름, 오른쪽에는 벵곶오름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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