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모든 생명은 존엄..의귀리 속냉이골 유격대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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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모든 생명은 존엄..의귀리 속냉이골 유격대 무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4.15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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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

의귀리 속냉이골 유격대 무덤
 

위치 ; 남원읍 의귀리 1931-1번지 일대. 속칭 속냉이골(속령골, 송령골)
유형 ; 무덤
관련 사건 ; 4·3 사건
시대 ; 대한민국

 


찾아가는 길 : 의귀초등학교에서 한남리 방면(서쪽)으로 900m 가면 도로 우측에 비닐하우스와 초록색 지붕 창고가 있는 밭이 있는 주변에 '한남간 204' 번호가 붙은 전신주를 볼 수 있다. 그 전신주가 있는 골목(반우향우 방향)으로 들어가면 50m쯤에서 오른쪽 길, 다시 50m쯤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면 왼쪽의 길로 200m쯤 가면 두 갈래길 동쪽에 산담이나 비석이 없는 무덤이 있다.

1949년 1월 12일 의귀국민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매장된 곳이다.

이 날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 1대대 2중대 본부를 상대로 한 무장대의 기습은 3시간이 넘는 치열한 전투로 회자되고 있다.

이날 토벌대는 4명이 전사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무장대가 교전 중에 사망했다.


1949년 1월 10일, 산사람(빨치산)들이 5시경에 주민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정보가 그 두 시간 전인 3시경에 2연대에 흘러들어갔다고 한다.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습격한 15명의 산사람은 학교 지붕 위에 기관총을 장착하고서 기다리던 군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군인들은 그들의 주검을 "빨갱이다"라며 주민들을 시켜 인근의 밭에 던지고 몇 줌 흙으로 대충 덮었다고 합니다. 이 곳은 그 15명의 산사람이 묻힌 곳이다.


이 무덤은 2004년 4월에야 확인되었다. 지금까지는 그 옆길 일제시대 무덤이 있던 곳이 유골이 묻힌 곳인 줄 알았다고 한다. 속냉이골 무덤 옆에 살았던 주민의 증언으로 이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무덤 옆에는 전봇대가 서 있다. 원래는 무덤 자리에 세울 것을 그 분이 이 곳은 유골이 묻힌 곳이라서 안 된다 해서 옆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여기에 묻힌 산사람들은 빨갱이로 규정되어 아직도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날인 1월 11일 11명의 수감자가 군인들에게 학살되고, 다음날인 1월 12일 새벽 재산무장대가 2연대 2중대를 습격했다. 그래서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인이 4명 희생되었다.

흥분한 군인들이 수감자들을 끌어내 같은 장소에서 80여명을 총살한 참혹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제주의 소리 2004년 5월 8일)


이윤의 {진중일기}에는 "오늘, 이 전투에서 우리 중대는 안중사 이하 4명이 전사했고(실제 사망자-일등상사 문석춘, 일등중사 이범팔, 이등중사 안성혁, 이등중사 임찬수 4인-역자 주) 5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본 반면, 반도들은 사살 96명, 생포 14명, 소총 60정과 도검류 다수와 놈들의 기밀문서 등을 노획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밝히고 있는 사살 숫자는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했다가 총살한 일반주민과 무장대의 숫자를 합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정확치는 않다. 어쨌든 무장대 측의 피해가 컸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1949년 1월 14일자 미군정 정보보고서(G-2보고서)에는 "약 200여명의 폭도가 1월 12일 새벽 6시 30분에 제주도 의귀리에 주둔하고 있는 제2연대 2중대를 기습했다가 패배했다. 2시간의 접전 끝에 폭도는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퇴각했다.

반면 한국군은 2명 사망, 10명이 부상했다. 폭도로부터 M-1소총 4정, 99식 총 10정, 카빈총 3정을 노획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시신은 학교 옆에 아무렇게나 방치됐다가 이곳 속령골에 집단 매장되었다. 부패로 악취가 심해져 가자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처리했던 것이다. 이후 돌보는 사람이 없이 최근(2004년)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이렇게 방치되던 이 무덤은 2004년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이 지역을 지나면서 표지판과 자그마한 방사탑을 세워 놓았다. 2004년 5월 14일의 일이다.

그날 생명평화탁발순례단(단장 도법 스님)은 제주4.3연구소, 현의합장유족회 등과 더불어 이곳을 벌초하여 표지판을 세우고 천도재를 치렀다.(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에서 퍼온 글)

다음은 표지판 전문이다.


모든 생명은 존엄한 것이다. 옛말에 '적의 무덤 앞을 지나더라도 먼저 큰절부터 올리고 가라'고 했다. 바로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의 와중에 국방경비대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의 유골이 방치된 곳이다.


당시 국방경비대 2연대 1대대 2중대는 남원읍 중산간 마을 일대의 수많은 주민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의귀초등하교에 수용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12일(음력 48년 12월 14일) 새벽 무장대들이 내습, 주민피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주둔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희생되고 말았다.

이 때 희생된 십수명의 무장대들은 근처 밭에 버려져 썩어가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곳에 묻혔지만, 내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덤불 속에 방치돼왔다.


우리 생평평화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였다.


'평화의 섬'을 꿈꾸는 제주도. 바로 이곳에서부터 대립과 갈등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우리 순례단은 생명평화의 통일시대를 간절히 염원하며, 모성의 산인 지리산과 한라산의 이름으로 방치된 묘역을 다듬고 천도재를 올리며 이 푯말을 세운다.


2004년 5월 13일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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