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한갯목..행원리 어등포(포구, 광해군 유배기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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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한갯목..행원리 어등포(포구, 광해군 유배기착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4.1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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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죠?"

행원리 어등포(포구, 광해군 유배기착지)
 

위치 ; 구좌읍 행원리 포구
시대 ; 조선
유형 ; 어로시설

 

 
 

어등포는 지금의 구좌읍 행원리에 있는 '한갯목'과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다. 어등포는 조선 후기에 어등포리에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구좌읍 행원리를 두고 어등개라고 한다. 그렇다고 행원리의 마을에 어등개라는 포구나 지명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등개는 바로 포구 이름이 아닌 마을 이름이기 때문이다.


효종4년(1653)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이 고홍진(高弘進)의 도움을 받아 간행한 제주목·대정현·정의현 읍지인 『탐라지(耽羅志) 』 수전소 條에서는 〈魚等浦 : 판옥전선 1척, 대변량 3섬, 곁꾼 104명, 사수와 포수 23명이 있다. 전선은 옛날에는 별방 북성 밖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 포구로 옮겼다.〉라고 기록하였다.


어등개 즉 행원리에는 터우매는개, 한갯목, 그리고 짚은개라는 세 개의 포구가 있었다. 터우매는개와 짚은개는 터우나 겨우 맬 정도의 작은 곳이였으니, 어등포는 지금의 한갯목을 지칭하는 이름일 것이다.


포구의 중심 칸살이 ‘한개’이고, 그리로 이르는 길목이 ‘한갯목’이다. 그래서 ‘한갯목’은 ‘한개’와 그 목을 합친 포구를 말한다.

서북쪽으로 나 있는 ‘막나라코지’와 ‘빌렛기’ 사이 깊게 600m 정도 후미져 들어간 ‘안소’에서부터 ‘밧소’, ‘한개’, 그리고 ‘한갯목’으로 이어진다.

‘안소’ 와 ‘밧소’ 사이에는 ‘더벵이물’로 이르는 길과 ‘밧소’와 ‘한개’ 사이에는 ‘셍이코지’에서부터 지금의 조선소(造船所)까지 돌다리가 놓였다. 그렇기에 ‘밧소’와 ‘한개’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기 전에는 ‘밧소’도 포구로 이용되었다.


‘한개’와 ‘한갯목’은 길목이 나 있는 방파제로 칸살이 나눠졌다. ‘한개’가 조간대(潮間帶) 하층에, 그리고 ‘한갯목’은 점심대(漸深帶)에 걸쳐 있다. 그래서 사리 썰물 때에는 ‘한개’로 배를 들여놓을 수 없다.

‘한갯목’ 칸살에 있는 ‘말뚝박은여’를 보조 포구로 삼았다. 말뚝박은여는 배를 매어 둘 때 닻줄을 묶어 두려고 말뚝을 박아 놓은 여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한개는 어떤 바람이나 물때에도 구애를 받지 않는 포구였다.


이증(李增)은 『남사일록(南槎日錄)』에서, 어등포(於等浦)는 무주포(無注浦)와 좌가마포(佐哥馬浦)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또 김상헌(金尙憲)은 『남사록』(南槎錄)에서, 어등포를 두고 김녕포(金寧浦)와 함께 "대강(大舡)도 댈 수 있다. 상선(商船) 역시 통한다"고 하였다.


어등포는 제주도 북쪽에 있는 다섯 개의 연륙 포구(連陸浦口) 중 그 하나라고 하였다. 또한, 그 당시 별방 방호소(別防防護所) 소속 전선(戰船) 1척과 함께 병선(兵船)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

『탐라록(耽羅錄)』(이형상의『甁窩全書』권9)은 '어등포(魚登浦)의 저녁 모습'은 제주 8경(濟州八景)의 하나라고 하였다.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에는 어등포리(魚登浦里) 앞쪽과 백석곶(白石串) 동쪽에 어등포가 있다고 하였다.

백석곶은 흰돌코지의 한자 차용의 표기다.(고광민, 『제주도포구연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03), 제주삼현도(濟州三縣圖), 남사일록(南槎日錄), 남사록(南槎錄), 탐라록(耽羅錄)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인조15년(1637) 조선 15대 국왕인 광해군이 폐위되어 제주로 유배될 때 이곳 행원포구로 입항하였다. 광해군은 선조8년(1575)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의 제15대 국왕이 되었다.

1623년 3월 13일에 일어난 인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 제주로 보내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내정 면에서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데 힘썼고,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고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러한 행위는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 중 이서와 이귀, 김유 등이 이러한 사류(士類)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광해군은 강화도에 부속된 작은 섬 교동도에 있다가 1637년(인조 15)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 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리어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추운 겨울에 추위를 염려하여 겨울옷을 광해군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의하면, 1637년 6월 6일 중사(中使)·별장(別將)·내관(內官)·도사(都事)·대전별감(大殿別監)·나인·서리·나장(羅將)들이 광해군을 압송하여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고, 다음 날 제주로 들어와서 위리(圍籬)하였으며, 속오군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번갈아 가며 숙직하였다고 한다.


인조16년(1638) 심연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인조가 광해군에게 여름과 겨울에 의복을 보내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640년(인조 18)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이 광해군을 잘 돌보았으나, 결국 1641년(인조 19) 7월 7일 제주읍성 내의 유배 장소에서 사망하였다.


광해군이 사망하자 인조는 예조참의를 제주에 파견하여 광해군의 시신을 옮겨 안장하였으며, 당시 제주목사 이시방과 제주도민들은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護喪)하였다.(디지털제주문화대전)


조선의 광해군(光海君, 1575~1641년, 재위 1608~1623년]은 1623년 3월 14일 새벽 황해도 평산 부사 이귀와 경기도 장단 부사 이서가 몰고 온 군사에게 어이없이 기습당해서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왕위에서 제거되었다. 이것이 인조반정이다.

대동법 강행이니 궁궐중수니 하는 여러 실책이 원인이 되어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 폐모살제[廢母殺弟]란 죄로 폐위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실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왕위에 오르도록 큰 역할을 했던 이이첨, 유희분을 필두로 한 대북파가 장기 집권하면서 다른 정파는 일체 용납도 안 했을 뿐더러 철저히 탄압해서 타 정파의 원한을 극대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이첨은 유능했었는지는 몰라도 극히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 그들 일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던 전 영의정 유영경부터 잡아 죽였다.


광해군의 큰 실정인 영창대군의 모살이라던가 친형 임해군의 사사라던가, 인목대비의 궁궐 밖 추방 등은 물론이고 여러 번의 옥사를 일으켜 타 정파를 제거했다. 광해군이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제거함에 앞장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의외로 소심한 성격을 가졌었다. 이이첨 일당이 위의 강경책을 밀어 붙일 때도 그는 끝까지 우유부단하게 주저했었다. 쿠데타 군에게 쫓겨서 창망히 궁에서 도망친 광해군은 반군의 주모자가 이이첨이 아니냐고 물었다 한다. 그 무렵 그가 이 이첨에게 가졌던 혐오감이 표시되는 일화다.(http://blog.daum.net/qkfka5201/大香)


처음에는 강화도 교동(喬洞)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1637년 유배소를 제주로 옮기려 사중사(事中使), 별장, 내관, 도사, 대전별감, 나인(內人), 서리(書吏), 나장(羅將) 등이 임금을 압송하여 6월 16일 어등포(지금의 행원리 포구)로 입항하여 일박하였다.

이 때 호송 책임자 이원로(李元老)가 왕에게 제주라는 사실을 알리자 깜짝 놀랐고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죠?" 하니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고 한다.

제주성 망경루 서쪽 배소(配所)에서 1641년 7월 1일 67세로 생을 마치니 목사 이시방(李時昉)이 염습하여 호송책임 채유후(蔡裕後)에 의해 8월 18일 출항, 상경하였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다.(2007년 2월 현지의 안내 표석)
《작성 070415, 보완 1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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