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지역 문화의 고장 애월..애월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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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지역 문화의 고장 애월..애월포
  • 김문주
  • 승인 2012.01.0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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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주의 포구기행)큰돈지 족은돈지 등 옛모습 그대로 남아

 

 

 

700여가구에 2,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애월읍 서부지역 최대 마을인 애월리는 제주시 중심부에서 서쪽 21km지점에 위치한 읍사무소 소재지로 이 부근의 행정, 교육, 산업의 중심지이며, 문화의 고장이다.

애월항은 애월읍 유일의 연안항.

애월에는 해안절경이 뛰어난 한담동 해안가와 사철 맑은 물이 솟아나는 하물 등 뛰어난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주산물로는 취나물이 유명하며, 양배추, 쪽파, 마늘, 양파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으며 해안절경이 아름다운 마을로 이름이 높다.


애월리는 제주시 중심으로부터 서쪽 21Km 지점에 위치한다.

 

지난 1968년 6월 16일 애월항 방파제 연장 공사에 국고 120만 원이 투자되어 동년 8월 10일 준공됨으로써 총 70m의 방파제가 완공됐다. 이후 1971년 12월 21일 애월항은 수산청 고시 제44호에 의거 제1종 어항으로 지정됐다.

이에 따라 1972년부터 시작된 애월항 항만공사는 총 공사비 8억 7900백만 원이 투자되어 13년 만인 1984년 완공됐고 물양장 364m, 북방파제 650m, 동방파제 90m, 남방파제 60m, 호안 30m 등으로 300톤급 화물선 4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995년 12월 29일 대통령령 제14853호 「항만법」 시행령이 개정, 공포됨에 따라 애월항은 연안항으로 신규 지정된 후 2001년까지 90여 억 원을 투입, 물양장 확충 및 평균 수심 4~5m의 깊이로 1,000톤급 선박 6척을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 연안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물양장 96m, 간이 선착장 50m, 배후 부지 포장 100a 등에 69억 3600만 원이 투자됐고 이에 따라 연간 모래, 시멘트, 비료, 감귤 등 59만 7420톤의 화물 처리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애월항은 제주시 인근의 항구로 다른 항구와 달리 모래와 시멘트 취급량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애월항에서 처리하던 화물 취급량을 중심으로 애월항의 변화를 살펴보면, 2000년을 기준으로 화물 취급량은 2002년까지 73만 7000톤에서 86만 1000톤에 이르기까지 증가하다가 이후 계속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 2006년 말에는 52만 2000톤을 나타내기도 했다.

애월개 또는 애월포로 불리우는 애월항은 애월리에 있는 포구로 포구의 맨 바깥은 큰돈지, 맨 안쪽은 족은돈지, 가운데는 샛돈지로 불리웠으며 배를 매는포구는 뒷개라 하여 지금도 옛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애월항 주변 배락코지와 너븐여 사이에는 죽든원이 있었다.

즉든원의 죽은 상어의 일종으로 '죽이 자주 들어와 잡혔다"는 데서 유래하며 원은 돌을 그물처럼 이용, 고기를 잡던 원시 어로형태를 말한다.

애월항 주변은 옛부터 고기가 잘 잡혔는지 남도리원이나 큰원 등 원시 어로용인 원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애월리는 탐라기년이나 탐라지 등에서 고려 원종12년(1271년)에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서 애월에 목성을 구축한 바 있고 고려 충렬왕(1300년)에는 동서도현에 애월현이 설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설촌은 13세기 이전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애월마을의 동남쪽 숙포미와 웃수령 곰베마실 경에 씨족 단위의 삶터를 군집으로 마련,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일대의 구릉과 암반대에 의지하여 비옥한 토지와 인근의 풍부한 용천수 및 연안 일대의 해산물을 생활기반으로 삼았으리라는 것.

다른 한편으로 애월 진성이 구촉됨에 따라 진졸들과 어업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들이 고려 후반기쯤부터 진과 포구 주변에 본격적인 정착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애월은 구전으로 어떤 승려가 말을 타고 성안으로 가다가 제지를 당하자 사람들에게 마을발전의 묘안이라며 일러준 말을 믿고 사람들이 탑바위를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가뭄과 흉년의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는 '탑아진밧' 전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구전은 이곳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며 이후 애월리의 하물을 중심으로 집단정착의 기반을 다지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한편 애월(涯月)이란 마을 이름은 일찍부터 한자화 됐으며 고유 이름은 달리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문헌 북제주군 지명총람, 마을이야기,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등)
 

한편 본 기사는 향토연구가인 김문주 씨(라마다플라자호텔 스포츠센터 대표)가 제주도 전체 해안을 발로 걸으며 조사한 제주포구 역사를 정리한  향토자료이다.

김 대표는 지난 9월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과 WCC성공을 기원하는 세계 최초로 제주 수영일주를 기획,성공한 장본인.

김 대표는 제주-수영일주 행사가 끝난 직후 약 20여일간 제주도 전 해안을 발로 걸으며 제주도의 포구를 사진과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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