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범꼬리 끝..유수암리 범미왓(동카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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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범꼬리 끝..유수암리 범미왓(동카름)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4.23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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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당시 가구수 약 19호에 70여 인의 주민이 살았던 작은 마을

유수암리 범미왓(동카름) 터
 

위치 ; 애월읍 유수암리 451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옛 마을 터

 


극락오름 북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범의 꼬리 끝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범미왓 혹은 호미동(虎尾洞)으로 불리는 곳으로 120여 년 전 설촌된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4·3사건 당시 이 마을은 가구수 약 19호에 70여 인의 주민이 살았던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 이국추(여, 2003년 85세)씨는 1948년 11월 16일 새벽에 토벌대가 동카름에 들이닥쳐 총을 쏘더니 집들을 방화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이 날 총소리를 들은 주민들은 동네 인근에 숨어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사전예고도 없이 이루어진 마을 방화로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방화를 하고 난 토벌대는 돌아갈 때도 총을 세 번 쏜 후 이웃 마을인 광령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 날 사전예고도 없이 이루어진 금덕리 동카름 방화사건은 한림면 금악리를 습격할 예정이었던 토벌대가 금덕을 금악으로 착각해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실수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동카름을 불태운 토벌대가 이웃 마을인 광령리로 이동하자 주민들은 집이 불탄 자리에 움악을 짓고 거주하다 며칠 후인 11월 21일 유수암리에 소개령이 내려지자 수산리, 하귀리, 신엄리, 이호리 등 각지로 흩어졌다.

유수암리 재건은 그 이듬해인 1949년 겨울 경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카름은 재건 당시 성을 쌓을 때에 성 밖에 위치하게 됐고, 그 후 주민들은 본동에 새로 집을 짓고 살거나 아예 소개한 지역에 눌러앉아 버려 동카름은 현재도 잃어 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당시 범미왓에 살았던 호주는 다음과 같다. 강일현(강창휴 부친), 강문휴, 강원학, 김아무개, 강희춘, 만춘 형제, 강남보, 문석주, 강원영, 강호선, 수용 형제, 채홍 부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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