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주민 모두 동원돼 쌓은..대포동 마을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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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주민 모두 동원돼 쌓은..대포동 마을성담
  • 고영철 제주문회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4.24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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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에 사용된 돌은 울담, 밭담, 산담 등 닥치는 대로 갖다 써

대포동 마을성담
 

대포동 마을방어성
위치 ; 서귀포시 대포동 1523번지, 1513번지, 1514-1번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

 


대포 마을의 성담은 한두 달 사이에 완성되었다. 당시는 13개 반이었는데 반별로 구역을 할당하여 성을 쌓았다.

노인을 제외한 주민이 모두 동원되어 축성 작업을 했다. 축성에 사용된 돌은 울담, 밭담, 산담 등 닥치는 대로 갖다 썼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하여 할당량이 미달되었을 때는 순경이 매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담의 남쪽 줄기는 동쪽은 '기정목' 고신 집터에서부터 '앞동산' 김장근 집터, 대포동 1523번지 이창옥씨 집 올레에 남아 있는 방사 돌담과 연결하여 '동물개동산', '큰동산' 그리고 여기에서 '진동산'을 향하여 북쪽으로 이어졌다.

북쪽 830-1번지 '활쏜밭' 그리고 '큰솔동산' 앞 1536-6번지 김성식 집터를 지나 북서쪽 '돌막음', '너븐밭', '소르기동산', '선질동산' 지경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에서 남쪽 '큰동산', '동물개동산'으로, 동남쪽 '진밭'에서 동쪽 '기정목'의 성담과 연결되었다.


'활쏜밭'에서 '기정목'까지는 이중으로 성담을 쌓았다. 마을 안 쪽에 있는 성담을 '안성', 바깥 쪽의 성담을 '밧성'이라고 했다.

대포동 1513번지, 1514-1번지에는 지금도 이중성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1514-1번지 임원배 감귤밭 동녘 담줄기는 '안성'이었다.

바로 동녘 감귤밭인 1513번지(당시 임상문 소유)의 서쪽 담줄기는 '밧성'이었다. 남북으로 뻗은 1513번지와 1514-1번지 사이에는 산사람들이 침입을 막기 위해 '줄가시낭'(큇가시낭)을 삽목하였다고 한다.

또, 지금 '중질'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미덕하우스 남쪽 축담이 이 때 쌓은 성담 줄기인데 우너래는 방사용으로 쌓았던 것이다. 옆에는 '볼레낭'과 '제배낭'이 밀식되어 있었다.


정문이 있었던 지점은 '기정목', '활쏜밭', '큰솔동산', '너븐밭', '소르기동산'과 '큰동산' 사이의 '선질동산' 길목, '동물개동산' 등 모두 6군데였다.

바다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인 '큰물개동산'은 대동아전쟁 때는 감시초소가 있었던 곳이다. 정문과 정문 사이에는 분초막이 있었다. 분초막에는 정문 초소에서 파견된 초소원들이 보초를 섰다.


대포동에서는 4·3 사건 동안 35인이희 생되었는데, 무장대에 의한 희생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희생자가 없었던 데에는 당시 고문규 이장의 역할도 컸다고 한다.


다음은 4·3 당시 겪은 일을 증언한 내용들이다.


김옥련(1921년생) ; 성담을 쌓을 때는 애기구덕 갖다 놓고 축성 작업을 거들었고, 나 버금 후배들 지금 예순여섯살에서 일흔 정도의 할망들까지 보초를 섰수다.


임관호 ; 구린질에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나무판에 글을 쓴 '낭삐라'를 살포한 사건이 있었고, 대포리 청년단장 원두병, 부단장 임관호였으며, 부단장이 총검술을 시키고 청년단에서 이상유무를 서귀포경찰서에 보고했다.


김항선 ; 지금 마을회관 자리에 중문지서 파견소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보조원 역할을 했습니다. 보조원은 17,8세 난 남자들인데 낮에는 경찰관 1명과 함께 사무실을 지켰고 밤에는 민보단 간부들이 교대로 근무했습니다.


이창옥 ; 스물다섯살 때 4·3 사건이 일어났는데 무장대의 습격은 없었습니다. 축성을 한 뒤에는 민보단을 조직하여 죽창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밤에는 6명에서 10명 단위로 조를 편성하여 동쪽 '꿩망동산'(현재 중문상고 앞)에서 서쪽 '장운다울'까지 성 바깥 지역을 교대로 순찰을 돌았는데 순찰 돌 때 가장 위험을 느꼈습니다. 낮과 밤에 한 번씩 서귀포경찰서에 이상유무를 연락했지요.


원승국 ; 4·3 사건 때에는 마음 놓고 바다에 다니질 못했수다. 경찰 허가를 받아야 고기잡이를 나가십주. 지금 마을회관 동남녘 시내버스 대포 종점에 접한 상점에 순경이 살았는데 원래 이 집은 적산가옥(敵産家屋)이었수다.


강영범(1940년생) ; 1569번지 우리 집이 5,6년 동안 중문지서 대포파견소로 이용되었는데, 주로 순경 1명씩 살면서 근무했습니다. 원희창, 정대진 집에 순경이 가장 오래 상근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반장 책임하에 반별로 돌아가며 파견된 순경의 식사를 담당했는데 반찬은 주로 달걀 지짐이였습니다.

4·3 사건 중엽부터는 가족을 데리고 와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대포리에 재향군인 사무실을 개설하고 이북 출신 원 아무개가 책임자로 있었는데 그는 마을 청년을 못 살게 굴어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대포리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의 가족들은 1960년대에 모두 서울로 이사했습니다.(큰갯마을 228∼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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