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썩은 동산..화순리 거욱돌탑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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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썩은 동산..화순리 거욱돌탑1호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5.23 0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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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반석이 있었던 석근동산에 돌탑을 쌓아 장수의 형상인 석상을 세웠다.

화순리 거욱돌탑1호
 

위치 ; 안덕면 화순리 썩은동산 위
시대 ; 조선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유형 ; 민속신앙(방사용 탑)

 


옛부터 화순리 동쪽 냇가 높은 언덕에 있는 큰 바위를 유반석이라 하고, 해수욕장 서쪽 바위산에 있는 큰 바위를 무반석이라 하였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동.서 동네 사람들의 신분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부터 동동네에는 양반들이 살았고, 서동네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살았었다. 동동네 사람들은 학식이 높고 지혜가 있었으나 힘이 장사인 서동네 사람들에게 늘 눌려 살았었다.

어느 해엔가 육지에서 온 신안(神眼)을 가진 이가 화순리에 들리게 되었다. 그는 동동네의 어느 집에 머무르면서 동동네의 유반들이 서동네 사람들에게 몰리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하다. 어째서 유반이 무반에게 몰리는가?'
하고 생각한 그는 일부러 더 머물면서 그 이유를 찾아 보았다.

며칠 동안을 찾지 못하다가 밤에 빛을 발하는 두 개의 바위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유반석과 무반석이었다.

두 개의 바위에서 발하는 정기가 불빛처럼 보이는데 무반석의 빛은 강한 반면 유반석의 빛은 반딧불처럼 약했다. 그는 곧 동네 사람을 불러내어 불빛을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유반석과 무반석이 정기(精氣) 싸움을 하는데 당신네 유반석 불빛이 형편없지요? 당신네들이 서동네 사람들에게 몰리는 이유는 바로 저것 때문이오."


이 말을 들은 유반들은 꾀를 내어 서동네 무반석을 쓰러뜨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 바위는 워낙 커서 유반들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무반들의 힘을 꾀로써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동네에 장사가 나서 양쪽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장밭에 모였을 때 동동네 사람들은 서동네 사람들에게 술을 많이 권하고 그들의 힘을 칭찬하였다.

한참 추그린(치켜올린) 후에
"자네들 기운이 좋덴 허여도 요 바위사 꼬딱 못 허주이."
하고 약을 올렸다.

술이 거나한 서동네 장사들이 힘자랑을 하려고 덤벼 들었다.
"요까짓것 말이여?"


여러 장사들이 지렛대까지 동원하여 힘을 합쳐 밀어내니 무반석은 그만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그 자리에서 청비둘이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서동네 사람들 중에서 장사들은 하나 둘 죽어가고 다시는 장사가 태어나지도 않았다. 차차 동동네 사람들이 세력을 잡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반들의 세력이 시들어가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유반의 술책에 넘어가서 자신들의 정기를 무너뜨리고 만 것을 안 서동네 사람들은 분개하여 일어섰다.


"저 동동네 유반석을 굴려 버리자."
우르르 달려들어 지렛대를 유반석 밑에 대고 받침돌을 고이고 힘을 썼다.

그러나 유반석은 높고 좁은 바위 위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가 없었고 장사들은 이미 다 죽어 버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만의 힘으로는 끝내 넘어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반석은 밑굽이 들리고 받침돌까지 받쳐진 채로 남아 있다.(濟州道의 文化遺産. 197-198쪽)

그 후 서동네 사람들은 무반석의 정기를 되찾기 위하여 무반석이 있었던 자리인 석근동산에 돌탑(아래 사진)을 쌓아올려 그 위에 장수의 형상을 한 석상을 세웠다.

모양은 다른 마을의 방사탑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석상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허(虛)한 곳이 아니라 월라봉의 유반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남제주군의 문화유적'에서는 이 탑과 석상을 '화순리 거욱 돌탑-1'로 명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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