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 굴묵 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는 간데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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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굴묵 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는 간데없고..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5.30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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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항상 물이 고여있는땅..화북1동 잃어버린마을 곤을동(곤흘동)

화북1동 잃어버린마을 곤을동(곤흘동)

 

위치 : 제주시 화북1동 4017번지, 4393번지, 4410번지, 4440번지, 4441번지 일대 화북천 하류 지역. 비석거리에서 왼쪽 길로 100m 정도 내려가면 별도봉 쪽 해안에 곤을동 표석을 볼 수 있다.
유형 ; 마을 터(잃어버린 마을)
시대 ; 대한민국

곤을마을터(제주밭담이야기)

 

화북1동_곤을마을터어귀담2(2007).

 


곤을동(곤흘동, 坤乙洞)은 화북동의 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항상 물이 고여있는 땅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곤을마을은 고려 충열왕 26년(1300년)에 별도현에 속한 기록이 있듯이 설촌된 지 7백년이 넘는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다.

옛날에는 '고놀개', '고로포', '곤을포', '고로촌', '고로동'으로 불리다 일제 강점기에 '곤을동'으로 정착되었다.


화북천의 하류는 비석거리 부근에서 둘로 갈라져 바다로 들어간다.(2007년에는 동쪽 지류를 막아 버렸다.) 마치 삼각주처럼 된 곳이 있었는데 이곳을 '가운뎃곤을'이라 하고, 내의 서쪽을 '안곤을'이라 하였으며, 내의 동쪽은 '동곤을' 또는 '밧곤을'이라 하였다.

1948년 이전에는 안곤을 22가구, 가운뎃곤을 17가구, 밧곤을 28가구 이렇게 세 마을 합하여 약 70호 정도가 살았던 곳이다.


밧곤을과 가운데곤을 주민들은 덕수물(4023번지 앞 5755번지)이란 용천수를, 안곤을 주민들은 안드렁물이란 용천수를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작지만 마을 공회당도 있었고 안곤을과 가운데곤을에는 ᄆᆞᆯ방애(말방앗간)도 있던 전형적인 자연마을이었다.


4·3 이후 토벌대나 무장대의 방화에 의해 없어진 마을은 모두 중산간 마을인데 비하여 곤을동만은 해안마을임에도 토벌대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복구되지 않아 '잃어 버린 마을'이 되었다.

그러면 왜 바닷가 마을인 곤을동이 군인들의 토벌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주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화북동 '남문' 주변 도로에서 군용차가 무장대의 습격을 당해 군인들이 죽었는데 그 중 살아남은 한 사람이 보니까 무장대 한 사람이 곤을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곤을동을 '폭도마을'로 규정하고 보복살인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 무장대는 곤을동 사람도 아니고 곤을동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라고 한다.(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 163∼210쪽에서 발췌)

그는 별도봉으로 숨어 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당시 별도봉은 지금처럼 나무가 우거진 게 아니라 화북동 주민들이 마소에게 먹일 촐(목초)을 베던 곳이어서 나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숨을 만한 곳은 없었으므로 별도봉을 지나 사라봉에 있는 일본군 갱도진지에 숨었을 가능성이 있다.


군인토벌대 1개 소대(42명)는 1949년 1월 4일(음력 1948년 12월 6일) 오후 3∼4시경 곤을동을 포위하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각각 집에 들어가서 마을 사람들을 무조건 나오라고 했다. 이들을 바닷가에 데리고 가서 10여명을 총살하였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불을 붙여 안곤을 22가구와 가운데곤을 17가구 모두를 불태웠다. 당시 집에는 석유병을 기둥에다 걸어두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그 석유를 촐(목초)이나 조짚, 보릿낭에 뿌려서 불을 붙이고 집을 불태우니 마침 사나운 북서풍에 삽시간에 다 타버린 것이다.

일부(12명)는 '화북국민학교'에 가두었다가 다음날(1월 5일) '연디밋(연대밑)'에 데려가서 총살했다. 그리고 곤을동 출입을 통제하고 밧곤을(동곤을) 28가구도 불태웠다.

이틀 동안 학살된 사람은 24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을은 없어져 버렸고, 지금까지 복구되지 않았다.


1949년 1월, 이렇게 해서 곤을동이 완전히 불타 버리자 살아남은 주민들(주로 여자와 어린 아이들)은 화북동으로 들어갔고 화북동 주민들은 화북마을의 공유지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그 때 집터라. 불쌍하다고 화북에서 공유지를 나누어 준 거지.”(안명호(1933년생), 2002년 증언 중 발췌)


살아남은 사람들은 내 가족이 아무 잘못 없이 목숨을 잃었지만 살벌한 시대라 억울하다는 말 한 마디 호소하지도 못한 채 살아난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기고 쥐 죽은 듯 침묵을 지키며 살아왔다.


곤을동 터에는 새로 입주한 사람들이 다시 어느 정도 마을 모습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옛날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은 튼튼한 다리가 화북천 양쪽을 연결하고 있지만 하천과 별도봉 사이에 있어서 비가 오면 고립되었고, 다른 마을과 떨어져 있어서 다시 피해를 볼까 두렵기도 하고, 먹는 물이 멀어서 길어다 먹는데 불편함이 있어서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삶이 너무 어려워 땅을 팔아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들로 하여금 귀향의 발길을 막았을 것이다.


옛 집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은데 골목길, 집 어귓담(4431-2번지, 4432-2번지)과 올레, 통시 자리, 불 탄 자국이 선명한 집벽과 굴묵 입구(4441번지), ᄆᆞᆯ방애돌(4439번지) 등을 볼 수 있다.

안곤을 서쪽 별도봉 절벽 아래에는 안곤을 주민들이 식수로 썼던 안드렁물(4453-2번지)이 지금도 그 물맛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의 서쪽에는 신당도 마련되었었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이 없다. 화북천 하류에 설치했던 갯담은 거의 허물어져 없어졌다가 1015년 경 누군가가 보수하여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곤을동에는 '멸치후리'계가 두 곳이 있을 정도로 멸치잡이는 성황을 이루었고, 야간에 횃불을 밝히고 멸치후리 노래를 부르며 그물을 잡아 당기는 광경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바다쪽에는 산책로가 개설되어 장수산책로와 연결된다.


안곤을 입구에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가 만든 '잃어버린마을' 표시판이 세워져 있다. 이는 제주도에서 벌인 사업의 일환으로 원래 2002년 표석을 세우고자 하였다.

2002년 당시 표석에는 초토화 작전이 군인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명기하지 않았는데, 이에 곤을동 출신 주민들의 반발로 표석을 세우지 못하였다.

결국 군인에 의해 곤을동이 초토화되었다는 문구를 삽입한 후, 2003년 4월 3일 표석을 세우게 되었으며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붙여진 이곳 제주시 화북동 곤을마을은 화북천 지류를 중심으로 밧곤을, 가운데곤을, 안곤을로 나뉘어진다.

곤을마을은 고려 충렬왕 26년(서기 1300년)에 별도현에 속한 기록이 있듯이 설촌된 지 7백년이 넘는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다.


주민들은 농사를 주로 했으며,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도 겸하면서 43호가 소박하고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4·3사건의 와중인 1949년 1월 4일 아침 9시경 군 작전으로 선량한 양민들이 희생되고 온 마을이 전소되는 불행을 겪었다. 이 어찌 슬프고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 모든 가구가 전소되었고 24명이 희생되었다. 초가집 굴묵 연기와 멜 후리는 소리는 간데없고 억울한 망자의 원혼만 구천을 떠도는구나!

별도봉을 휘감아 도는 바닷바람 소리가 죽은 자에게는 안식을, 산 자에게는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4·3사건으로 하여 이 고장을 지키다 가신 님들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빌면서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 표석을 세운다.


2003년 4월 3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위원장 제주도지사〉
《작성 070901, 보완 17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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