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미밋동산'이라 부르던..조천리 만세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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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미밋동산'이라 부르던..조천리 만세동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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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삼매봉 만세운동과 해상 만세시위, 제주해녀 항일운동 등으로 맥 이어져

조천리 만세동산

 

조천리 만세동산
위치 ; 조천리 만세동산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선현유적

 


1919년 3월 1일부터 전개된 대한독립만세시위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민족의 염원이 담긴 전국적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전국적 규모의 독립운동인 만큼 제주에서도 만세시위는 펼쳐졌다.


제주의 만세시위는 서울보다 20일 늦은 3월 21일에 시작되었다. 제주도 만세운동은 조천출신 항일운동가 김시학의 아들인 김장환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몰래 가지고 입도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서울 휘문고등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장환은 귀향하자마자 당숙인 김시범과 김시은을 찾아가 거사의 뜻을 설명하였고, 이 세 명이 조천리 미밋동산(지금의 만세동산)에서의 거사를 발의하였다.

그리고 3월 19일까지 14명의 동지를 규합하였고, 당시 조천에서 명망 높은 유림이었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거사를 위해서 김형배가 대형 태극기 4본을 제작하고 김시범, 백응선 등이 소형 태극기 300여장을 준비하였다.


이윽고 3월 21일이 되자 조천리 미밋동산에 14인의 동지와 더불어, 조천 마을 주민들과 인근의 신흥, 함덕, 신촌 등지 서당생 150여명이 모여들었다. 14인의 동지 중 김필권은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창호지에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써서 들고 조천주재소 서쪽에서 미밋동산으로 이동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에 시위군중의 규모가 커져서 그 수가 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시위대는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다음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시가행진은 미밋동산에서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시내를 향해 진행되다가 출동한 경찰에 부딪쳐 13명이 연행되고 해산되었다.


3월 22일에는 백응선, 박두규, 김필원이 주도하여 200여명이 조천에 모여 전날 연행된 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2차 시위를 펼쳤다.


3월 23일에는 백응선, 김두배, 이문천이 중심이 되어 3차 시위를 펼쳤는데, 조천에서 시작할 때 100명이었던 시위대는 함덕에 이르러서는 군중들이 가세하여 800명이 되었다.


3월 24일은 조천 장날이었다. 이날 김연배의 주도로 열린 4차 시위에는 1500여명의 군중이 참여,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날 시위에서 만세운동의 주동자 14명 전원을 포함하여 29명이 검거되었다.


당시 제주경찰서 조천주재소에는 간타(神田) 순사부장과 순사 2명, 보조원 2명 등 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조천주재소의 경찰 병력으로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할 수 없게 되자 급히 제주경찰서에 경찰의 증원을 요청하였고 얼마 없어 30명의 순사가 도착하였다.


1차 시위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김용찬(金容燦)·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황진식(黃鎭式)·김장환(金章煥)·김경희(金慶熙)·김희수(金熙洙) 등 모두 13명이 연행되었다.


이 때 형이 확정된 항일 인사들은 김시범(30세, 잡화상), 김시은(30세, 잡화상)은 각각 징역 1년형, 황진식(20세, 농업), 김장환(18세, 학생), 김필원(金弼遠, 20세, 농업), 김희수(21세, 농업), 이문천(李文千, 28세, 잡화상), 박두규(朴斗圭, 23세, 교사), 김연배(金年培, 24세, 농업) 등 7인은 각각 징역 8월형, 김용찬(31세, 잡화상), 고재륜(21세, 농업), 김형배(19세, 농업), 김경희(26세, 농업), 백응선(白膺善, 24세) 등 5인은 각각 징역 5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또, 김시희(金時熙, 37세, 농업), 김백능(金百能, 22세, 농업), 부병각(夫秉恪, 22세, 농업), 김종호(金宗鎬, 18세, 무직), 한석영(韓晳瑛, 23세, 농업), 한석화(韓錫化, 23세, 농업), 김동인(金東仁, 21세, 용인), 김순탁(金淳鐸, 25세, 농업) 등 8인은 집행유예 3년을 받았으며, 한백흥(韓伯興, 21세, 농업)은 징역 4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들 14인 중 한석영·한백흥은 함덕리 출신이며 나머지는 모두 조천리 출신이다. 1920년 4월 8일 만기출옥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투옥됐던 동지 14인이 모여 미모치(味毛峙)의 동지라는 뜻인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다.

일생 서로 도우며 살기로 하고 재무는 김희수가 담당하였다. 첫 사업으로 순사(殉死)한 동지 백응선의 묘비를 건립하기로 하고 이 비문을 김시범이 지었는데 일제의 연호를 쓰지 않고 단기 연호를 썼다.


조천 만세운동으로 검거된 분들 중 23명에 대해서는 1919년 5월 29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실형이 선고되었는데, 김시범과 김시은에 대해서는 징역 1년 형이 처해지고, 나머지 인사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형량이 선고되었다. 제주의 항일기운에 놀란 일제가 비교적 유화적인 방식으로 그 통치 전략을 바꿨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구복심법원의 기미조천만세사건 주동인물 23인에 대한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전라남도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 잡화상 김시범 당30세
전(前)과 동소(同所) 잡화상 김용걸 당31세
전(前)과 동소(同所) 농업 김형배 당19세
전(前)과 동소(同所) 학생 김장환 당18세
전(前)과 동소(同所) 농업 김필원 당20세
전(前)과 동소(同所) 과자상 백응선 당24세
전(前)과 동소(同所) 교사 박두규 당23세
전(前)과 동소(同所) 잡화상 김시은 당30세
전(前)과 동소(同所) 농업 고재륜 당21세
전(前)과 동소(同所) 잡화상 황진식 당20세

전(前)과 동소(同所) 농업 김경희 당26세
전(前)과 동소(同所) 농업 김희수 당21세
전(前)과 동소(同所) 잡화상 이문천 당28세
전(前)과 동소(同所) 농업 김년배 당24세


위 자에 대한 보안법위반 피고사건에 대하여 대정9년(1919)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피고 金時範, 金時殷, 黃鎭式, 金章煥, 金年培를 각각 징역1년, 피고 金弼遠, 金熙洙, 李文千, 朴斗圭를 각각 징역8월, 피고 金容燦, 高載崙, 金瀅培, 金慶熙, 白膺善을 각각 징역6월에 처함.
판결에 대하여 동 피고인 등으로부터 각각 공소의 청원에 의하여 당원(대구복심법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野田昞雄 간여로 심리 판결 다음과 같음


주문 : 원 판결 중 피고 金時範, 金時殷, 金容燦, 高載崙, 金瀅培, 黃鎭式, 金章煥, 金慶熙, 金弼遠, 金熙洙, 白膺善, 李文千, 金年培, 朴斗圭에 관한 부분은 취소함. 피고 金時範, 金時殷을 각각 징역1년에 처하고, 피고 黃鎭式, 金章煥, 金弼遠, 金熙洙, 李文千, 金年培, 朴斗圭를 각각 징역8월에 처하고, 金容燦, 高載崙, 金瀅培, 金慶熙, 白膺善을 각각 징역6월에 처함. 압수에 관계된 제1호, 제2호의 기(旗)는 이를 몰수하고 기타의 물건은 각각 차출인에게 환부함.


대정8년(1919) 5월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1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竹尾義磨
〃 長野一郞
〃 原 田 等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尹 遠 洙
그 외 광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항소하지 않은 분들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조천리 金東仁 징역6월 집행유예3년
조천리 韓錫化 징역6월 집행유예3년
조천리 金時熙 징역6월 집행유예3년
조천리 金宗鎬 징역6월 집행유예3년
조천리 金淳宅 징역6월 집행유예3년
조천리 夫秉恪 징역6월 집행유예3년
함덕리 韓晳瑛 징역6월 집행유예3년
조천리 金百能 징역6월 집행유예3년
함덕리 韓伯興 징역4월 집행유예3년

조천 만세운동의 여파는 곧바로 서귀포로 전해져, 서귀포 삼매봉 만세운동과 서귀포 해상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제주해녀 항일운동 등으로 그 맥이 이어졌다.


조천마을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마을의 동쪽에 이르면 만세동산이 나온다. 1919년 3월에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을 당시 '미밋동산'이라 부르던 곳을 지금은 만세동산으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 있다. 만세동산입구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3·1운동 기념탑' 바로 아래는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형을 선고받은 23명의 이름이 형량순으로 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김봉각 선생 공덕비'가 있다. 김봉각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해서 만세동산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사업비 5억원을 헌납한 장본인이다.(제주의 소리 2007년 08월 27일)


김시범, 한백흥 선생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2012년 현재)
《작성 070915, 보완 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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