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자주교육운동..조천리 조천중학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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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자주교육운동..조천리 조천중학원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08 0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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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리는 조천중학원을 중심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해방직후 지역의 정국 주도

조천리 조천중학원터

위치 ; 조천읍 조천리 보건소조천지소
유형 ; 위인선현유적
시대 ; 대한민국(정부수립 이전)

 


해방후 제주도에서 주민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자치정부 구성과 교육이었다.

자치적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지역적 특성과 일제 때부터 계속된 민족해방운동의 전통. 민족세력의 영향력 등으로 45년 9월 제주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잇따라 결성됐다.

다른 지방보다 일찍 결성된 인민위원회는 가장 오랫동안 지탱돼 46년까지 도 전역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게 된다.

인민위원회의 구성과 병행하여 민중이 주력한 것은 자주교육운동을 통한 사상과 학문의 보급이었다.

일제시대에는 농업학교 하나밖에 없었던 제주도에 오현중, 제주중, 제주여중 등을 창설하는 것을 필두로 1945년부터 1946년까지 27개 학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문맹퇴치를 위한 무수한 강습소를 세우고 『제주신문』도 펴냈다.

이러한 교육운동과 문화운동이 제주도 인민위원회와 민중을 연결하는 공간이 되었고 민중의 자치의식과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근원으로 작용하였다.

자주교육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조천중학원이었는데, 1946년 가을에 세워져 5.10단선선거 때 강제폐교를 당할 때까지 진보적인 지식인과 지역의 유지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주·야간 합쳐 2백여명에 불과했으나 현복유(경제·사회), 김민학(수학·물리), 김동환(영어·불어), 이덕구(역사·지리) 등 교사들 13인이 모두 일본에서 돌아온 유학생들로 하귀중학원과 함께 교육수준이 공립농업학교보다 매우 높았다.

교사들은 모두가 4.3항쟁시 항쟁지도부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였을 뿐만아니라 지역의 민중과의 연대투쟁을 전개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천리는 조천중학원을 중심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해방직후 지역의 정국을 주도했다. 조천중학원생 김용철은 4·3 직전에 조천지서에서 고문치사를 당했다.

현재는 보건소조천지소가 들어서 있고 당시 흔적은 찾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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