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당쟁으로 희생된 국왕..이도1동 광해군 적소(光海君謫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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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당쟁으로 희생된 국왕..이도1동 광해군 적소(光海君謫所)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14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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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5대 국왕 광해군(光海君)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도1동 광해군 적소(光海君謫所) 터

위치 ; 이도1동 1474. 중앙로 국민은행 중앙점 위치가 광해군 적소 터이다.
유형 ; 위인선현유적
시대 ; 조선

 


선조의 아들이며 조선 15대 국왕인 광해군(光海君)은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내정 면에서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데 힘썼고,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고 군적(軍籍) 정비를 위한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외교 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後金)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국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러한 행위는 패륜으로 여겨졌고,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광해군이 즉위할 당시부터 권력을 잃었던 서인 세력 중 이서와 이귀, 김유 등이 이러한 사류(士類)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계획,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1623년 3월 13일에 일어난 인종반정(그의 죄목은 혼란무도(昏亂無道) 실정백출(失政百出)이었다.)으로 폐위되어 광해군으로 강봉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인조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안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강화도로 옮겨졌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인조15년(1637) 제주로 보내졌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 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리어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추운 겨울에 추위를 염려하여 겨울옷을 광해군에게 하사하기도 하였다. 사중사(事中使), 별장, 내관, 도사, 대전별감, 나인(內人), 서리(書吏), 나장(羅將) 등이 임금을 압송하여 6월 16일 어등포(지금의 행원리 포구)로 입항하여 일박하였다.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호송 책임자 이원로(李元老)가 왕에게 제주라는 사실을 알리자 깜짝 놀랐고 마중 나온 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죠?" 하니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고 한다.


인조18년(1640) 9월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시방(李時昉, 심연(沈演)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 인조20년(1642) 8월 체임)이 광해군을 잘 돌보았으나, 결국 인조19년(1641) 7월 7일(혹은 1일) 67세로 제주읍성내의 망경루 서쪽 배소(配所)에서 사망하였다.(위리안치되었던 곳은 서성 안이라는 설과 남성 안이라는 설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광해군이 사망하자 목사 이시방은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시체를 운구하려면 형색이 변하여 취증할 수 없으므로 숭종의 예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모든 관리를 거느리고 소복으로 친히 염습하였으며 제주도민들과 함께 조정에서 예관이 도착할 때까지 예를 갖추어 호상(護喪)하였다.

인조는 호송책임으로 예조참의 채유후(蔡裕後)를 제주에 파견하여 8월 18일 출항 광해군의 시신을 서울로 옮겨 안장하였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달리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다.(2007년 2월 현지의 안내 표석) 남환박물에는 적소(謫所)가 서문 안에 있었다는 설이 있으며, 1653년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때 그들이 수용되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 의하면, 1637년 6월 6일 중사(中使)․별장(別將)․내관(內官)․도사(都事)․대전별감(大殿別監)․나인․서리․나장(羅將)들이 광해군을 압송하여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고, 다음 날 제주로 들어와서 위리(圍籬)하였으며, 속오군 유진군(留鎭軍) 중에서 30명이 번갈아 가며 숙직하였다고 한다.

인조16년(1638) 심연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에는 인조가 광해군에게 여름과 겨울에 의복을 보내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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