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버드리못..와흘리 궷드르(잃어버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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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버드리못..와흘리 궷드르(잃어버린마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18 0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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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이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사람마다 팡팡 쏘아 죽여 버렸어"

와흘리 궷드르(잃어버린마을)

위치 ; 조천읍 와흘리 60번지 일대. 번영로 북쪽
유형 ; 잃어버린 마을
시대 ; 대한민국

 



와흘리에 속하는 궷드르(고평동)는 약 300년 전에 김해김씨 金永信이 살림이 궁색하여 살 곳을 찾아 대흘리로 왔으나 정착할 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올라간 곳이 속칭 버들못(버드리못=봉천수)이며, 사방이 광활하여 우마 기르기에 좋고 화전을 하기에도 좋아 정착하게 되었고, 버들못 위쪽 밭에 위가 평평하고 작은 궤가 있어 마을 이름을 궷드르라 부르게 되었다.(조천읍지 274∼275쪽)

궷드르는 인근 '물터진굴'이란 마을과 함께 4·3 당시만 해도 와흘2구를 이루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었다.

궷드르는 토벌대의 초토화작전 초기 단계에서 피해를 본 마을이다. 해안에서는 8km, 교래리에서는 4km쯤 떨어져 있는 마을이어서 교래리와 같은 날인 1948년 10월 11일 군인 토벌대에 의해 불시에 방화·소개되었다.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가 설치되고 그 후 전도에 걸쳐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궷드르와 같은 중산간 마을은 11∼12월 사이에 소개작전과 더불어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궷드르 주민들은 토벌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불을 지르는 통에 해안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산으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을 맞아 급한 대로 인근의 궤 등에 일시 몸을 숨겼다.

그러나, 토벌대에 발각되면서 현장에서 총살되기 일쑤였다. 궷드르 출신으로 지금도 궷드르에 살고 있는 김동규(2003년 67세)씨가 말하는 소개 당시 이야기는 토벌의 무모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산에 있는 건 무조건 폭도 취급을 했지. 교래리로부터 9연대 군인 13명이 와서 싹 불태워 죽였지. 산사람들이 약하긴 약한 모양이라 군인 13명을 못 당했으니까. 그 때 요행히 살아난 사람들은 조사받아봐서 죄가 없으면 살고, 자식이 산에 올라가든지 해서 산에 연결되면 그건 뭐 빨갱이가 되어 죽게 된 거지. 군인들이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사람마다 팡팡 쏘아 죽여 버렸어.

총때기(개머리판)로 때려 버리면 머리에서 골이 막 나왔어. 아이고…. 우리가 그걸 묻었지. 그 날 우리 어머니도 집안에서 죽었어. 집을 그대로 놔 두면 산사람들이 마을에 살면서 양식도 마련하니까 아니꼽다고 다 불질러 버린 거지. 궷드르에서만 그 때 한 50명은 죽었어. 제삿날이 똑 같아."

궷드르에서는 11월 13일 마을 방화시에 희생된 주민들과 해변 마을 소개지에서의 대살(代殺), 자복사건에 의한 박성내 집단학살 그리고 무자기축년 겨울 내내 야산에 은신했다가 토벌대에 잡혀 희생되는 등 230여 명의 주민 중 12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용케 1949년 봄까지 살아남은 주민들은 귀순하여 더러는 형무소로 갔다. 나머지 주민들은 아랫마을에 있는 대흘국민학교에 성을 쌓고 함바집을 지어 와흘1구와 대흘, 와산, 교래리 주민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했다.

1952년부터 와흘1구를 포함한 인근 마을이 재건되면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있던 와흘2구 궷드르와 물터진굴은 재건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때문에 궷드르 주민들은 그냥 대흘리에 눌러앉거나 다른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1957년 궷드르가 허가를 받아 재건에 나서 10여 호가 복구해 들어왔으나 얼마 있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궷드르 출신으로 지금도 궷드르에 살고 있는 사람은 김동규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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