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무도한 학살 ..와흘리 물터진굴(물터진골, 잃어버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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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무도한 학살 ..와흘리 물터진굴(물터진골, 잃어버린마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19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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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이 지면 내가 터져서 마을 안까지 침수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와흘리 물터진굴(물터진골, 잃어버린마을)
 

위치 ; 조천읍 와흘리 209번지 일대. 번영로 검문소 서쪽 300여M 지점에서 북쪽으로 우석목장 간판에서 길 양쪽
유형 ; 잃어버린 마을
시대 ; 대한민국

 


'물터진골(굴)'은 제주시 조천읍 외흘리에 속한 중산간 마을이다.

번영로와 남조로가 교차하는 경찰검문소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5백 미터쯤 내려가면 궤뜨르(고평동) 마을이 보이고, 거기서 서쪽 5백미터 쯤에 물터진골 마을이 있다. 큰 물이 지면 내가 터져서 마을 안까지 침수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수개동(水開洞)이란 한자 표기를 쓰다가 일제강점기에 수기동(水基洞)이라는 한자식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4·3 당시에는 15가호 정도가 농축업에 종사하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마을이며, 궷드르와 함께 조천면 와흘2구를 이루는 당당한 법정리이기도 했다.


물터진골은 1948년 11월 13일 9연대 군인들에 의해 주민 대다수가 학살 당하고, 온 마을이 방화 소각됨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폐허의 마을로 남아 있었다.

그 사이 마을의 땅들은 다른 마을 유지들에게 넘어가고 말았으며, 팔았다 하더라도 먹고 살기 힘든 세월이었으므로 제 값을 받지 못한 채 거의 타인의 것이 되고 말았다.


4·3 초기 와흘2구는 워낙 깊은 중산간 마을이어서 비교적 무장대의 입김이 강한 소위 민주부락이었다. 4월 3일 당일에도 마을 주변의 바늘오름과 새미오름에 봉화가 오르는 걸 주민들은 보았다고 한다.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시에는 선거관리위원들이 사표를 내고 잠적해버렸으며, 궤뜨르와 물터진골 주민들 또한 밭에서 일을 하거나 바늘오름과 새미오름 근처에 잠시 피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와흘2구 마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공통된 현상이었다.
조용했던 궷드르와 물터진골이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되던 날은 1948년 11월 13일이었다.

이날 송당에 주둔했던 9연대(연대장 중령 송요찬) 2대대(대대장 대위 김창봉) 주력부대는 새벽에 교래리를 기습하여 마을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집단학살한 다음, 날이 밝을 무렵 와흘2구인 궷드르와 물터진골로 이동하여 마을에 남아있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모든 집을 불태웠다.


당시 와흘2구는 약 40여 호에 2백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와흘1구는 이틀 전 마을 방화에도 불구하고 큰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와흘2구는 이날 50여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대다수가 부녀자나 노인들, 어린 아이들이었다. 젊은이들은 이미 근처 야산으로 피신해 있으면서 더러는 이 광경을 목격했다.


"물터진골이 불타는 걸 근처에 숨어서 지켜 보았는데, 총소리가 났지만 설마 사람 죽이는 걸로는 생각도 안했지. 서너 시간 후에 현장에 가보니까 처참한 모습이었어. 마을 옆에 숨어 있던 아주망 하나, 하르방 하나 살아 있고, 나머지는 전부 죽어 있었으니까.

어린 아이를 안은 아주망은 창자가 터져 불룩불룩 거리면서 물을 달라고 겨우겨우 말을 하는데, 총을 맞은 사람에게 물을 줄 수도 없고, 무슨 약이 있어서 치료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도 이미 죽어 있었지. 다른 담벼락 옆에는 할머니하고 애기들이 엎어져 죽어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앞도 못보는 사람이었지. 군인들은 늙은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고 그냥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쏘아 죽여버린거야." 당시 상황을 지켜본 강인조(80)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이 날 또 아랫 마을인 신촌리에서 피난 온 여자들 9명가량이 물터진골과 궷드르 가운데에 있었던 말방앗간에 숨어있다가 죽임을 당했다. 공식적인 소개명령도 없이 벌어진 9연대의 무도한 학살극에 와흘2구 마을의 삶의 공동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날의 학살은 11월 17일에 내려진 계엄령 선포 사흘 전이었다.


살아남은 와흘2구 주민들은 11월 21일, 마을 방화와 함께 소개령이 내려지자 조천과 신촌리로 피난갈 수 밖에 없었다. 학교나 창고 등에 수용된 이들은 시시각각 찾아드는 군경의 사상검열과 축성작업에 시달리다가 일부는 자복사건에 걸려들어 박성내에서 총살당하기도 했다.

그 후 궷드르와 물터진골의 와흘2구 주민들은 대흘국민학교에 성을 쌓아 살다가, 일부는 1957년에 마을 재건과 함께 올라왔다가 대부분이 다시 내려가 신촌, 대흘, 조천, 제주시 등지에 흩어져 살고있다.

궷드르 출신의 김경생씨는 "사람들이 다 죽어 버리고 성한 집안이 우리밖에 없었어. 그러니 벗도 없는데 가서 혼자만 어떻게 살아?"라고 말했다.(제주4·3유적Ⅰ 389∼390쪽, 한라일보 2007년 8월 31일)


2001년에 세워진 '잃어 버린 마을' 표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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