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도노미..봉성리 자리왓(잃어버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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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도노미..봉성리 자리왓(잃어버린마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22 0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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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온 저 팽나무를. 서러운 옛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가."

봉성리 자리왓(잃어버린마을)
 

위치 ; 애월읍 봉성리 농협봉성지점 맞은편 도로로 동남쪽으로 600m쯤 가면 ‘봉성푸른작목반’ 간판이 있는 비닐하우스가 있고, 그 맞은 편으로 난 시멘트길을 따라 2000m를 간 곳
시대 ; 대한민국
관련 사건 ; 4․3 제주민중항쟁
유형 ; 마을 터


 

 

 

봉성리의 옛 이름은 '도노미'이다. 조선시대 고종 이후 어도리로 불려지다 1950년 봉성리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4․3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어도2구는 자리왓(35가호), 열류왓(15가호), 멀팟(15가호), 고들리왓(15가호), 지름기(15가호), 상시머름(10가호), 솔도 등 7개 자연마을을 품고 있었다.

자리왓을 비롯한 어도2구 주민들은 소개령에 따라 어도1구로 내려와 살다가 현재의 신명동에 재건마을을 형성한 후 1구와 2구가 합병하게 되면서 봉성리로 마을명을 개칭하게 되었다.

당시 마을개명추진위원회에서는 마을 앞에 있는 어도봉(도내봉)이 봉황새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봉성리로 마을명을 결정하였다.


어도2구의 중심마을이었던 자리왓은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 반대를 위해 전 주민이 새별오름 앞에 있는 '자굴왓 굴'로 피신했다가 다음날 마을로 돌아오며 4․3의 수렁으로 들어 가게 된다.

토벌대의 작전이 시작되면서 자리왓에도 1948년 11월 23~25일 3일 간 소개명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벌어진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주민들이 후에 마을에 와보니, 잿더미가된 자리왓의 대지는 벌겋게 달구어진 붉은 땅이었다고 한다.


1948년 10월 26일 새벽, 토벌대는 자리왓 등 어도 2구에 들어와 가가호호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 때 젊은이나 도망갈 기미를 보인 사람 중 5명을 체포했다.

군인들은 곧 이들을 자리왓 입구의 금성천 상류에 위치한 불미집으로 데려가 총살했다. 이 중 양중화, 강이검, 양오문, 강희전 등 4명은 현장에서 희생됐으나 강원선은 총을 맞고도 살아 남았다.


소개 이후에도 토벌대에 의해 자리왓 주민들의 죽음은 계속되었다. 멀팟 굴에 숨었다가 홍창훈(21)이 희생되었으며, 지름기 근처에 숨어 있었던 강병용(22), 문병휴(23)도 경찰에 잡혀 총살되었다. 한림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에 잡혀가 오태유(25), 안국천(21) 등 4명도 희생되었다.


자리왓 마을 입구에 자리잡았던 신명서당은 일제시대 초기에 세워져 구학문을 가르쳤으나 1940년대 부터는 학년제를 도입하여 신학문을 교육했다.

4․3당시에는 4학년까지 두고 있었으며, 충실한 교육과정과 열의있는 선생으로 인하여, 어도2구 학생은 물론 1구와 어음리 학생들 까지도 유학올 정도로 명성이 자자 했다.

당시 선생님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강몽규 선생이었는데, 학생들과 고구마를 쪄서 함께 먹고 있던 중 1948년 9월쯤 애월지서 경찰들에 의해 피살되고 만다.

이때 서당에 함께 있었던 구서기 강창염은 뒷담을 넘어 도망치던 중 경찰의 총에 맞아 발에 총상을 입었으나 죽기살기로 뛰어 열류왓 친족집에 숨어 살아 난 후 70년대에는 애월면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저는 신명서당 1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강몽규 선생은 교양과 민족의식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5․10선거 때는 학생들에게 마을 안길 행진을 시켰으며 들판에서 야외수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강규방 씨의 증언이다.


강 씨는 선생님의 이러한 모습이 경찰의 주목을 받게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당시 자리왓의 호주는 강경춘, 김인생, 문철연, 문말연, 김유만, 강창호, 문갑주, 문석윤, 고평연, 문군하, 문예천, 문인하, 강군선, 문일생, 문수휴, 문달휴, 강창염, 문계표, 문을표, 문술송, 문평만, 강술생, 강몽규 등이다.


현재 자리왓 일대에는 4․3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에 큰 팽나무가 남아 있고, 곳곳에 제주도 특유의 좁고 구불구불한 울레터와 집터 흔적임을 말해주는 대밭들이 남아 옛 정취를 전하고 있다.

팽나무 옆에는 지난 2002년 제주도에 의해 세워진 '잃어버린 마을' 표석이 있어 마을의 비극적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신명동은 봉성리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4․3 이후의 재건마을로 자리왓을 비롯한 어도2구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다.

어도2구 주민들은 소개 후 1구와 귀덕 등지에 흩어져 살았다. 1구에 소개했던 2구 주민들은 약 2년 후 고향 마을로 돌아가기 어려워지자 회의를 열어 1구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곧 문수휴, 강정춘 등을 중심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어도리 3147번지 일대 강모 씨의 땅을 외상으로 구입하여 각자 터를 잡아 움막을 지었다.

이런 움직임에 그 동안 남의 집에 살거나 귀덕 등지에 흩어졌던 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신명동이라는 큰 동네가 탄생하게 되었다.

1962년 마을 재건 정책에 따라 10여호 정도가 건축자재를 지원 받아 자리왓에 정착했으나 몇 년 후에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건축자재를 뜯고와 지은 재건주택이 지금도 신명동에 3채 남아 있다.

어도2구 주민들이 고향 마을을 복구하지 않은 이유는 밭농사 위주의 생활이어서 신명동에 살면서도 농사짓기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마을 중심에 팔각정을 세워 마을 유래사를 보관하고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애월읍 농협 봉성지점에서 남쪽(한라산 방향) 신명동 쪽 대로로 들어서서 700m 정도 가면 마을 끝 지점에 첫 갈림길이 나온다.

남서쪽 방향의 시멘트 도로를 따라 2k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 소로길에 큰 팽나무가 있는 곳이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왕돌거리이고, 잃어버린 마을 표석도 세워져있다. 표석 내용의 일부분이다.

"주민들은 봉성리 입구 신명동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한 이후 자리왓 등으로 전혀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 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저 바람에 스석대는 대숲이 있던 집터와 밭담 사이로 자그맣게 남아있는 올레, 그리고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살아온 저 팽나무를. 서러운 옛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가."

아래 사진의 말방앗돌은 2007년 10월에 찍은 것인데 2012년 11월 11일 답사 때는 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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