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치 떨리는 악몽..성산리 서북청년단주둔소(성산동공립국민학교)터(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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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치 떨리는 악몽..성산리 서북청년단주둔소(성산동공립국민학교)터(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24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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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람을 데려오면 무조건 때려놓고 취조를 시작했다"

성산리 서북청년단주둔소(성산동공립국민학교)터(멸실)


 

성산리 서북청년단주둔소(당시 성산동공립국민학교 건물)
위치 ; 성산읍 성산리 173-1번지 성산리사무소 앞 킹마트 뒤편
시대 ; 대한민국
관련 사건 ; 4·3제주민중항쟁
유형 ; 건물

성산리_서북청년단주둔소(한라일보)

 

성산리_서북청년단주둔소

 


일제강점기 동안 성산리에는 1919년 9월 현재의 KBS 송신소 인근(현 성산초등학교 동쪽 일대)에 설립한 일본인학교인 성산포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으며, 교사 2명, 아동 20명이었다.

1939년 3월 31일 당시 성산포동공립심상고등소학교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고 수업년한은 심상과(尋常科) 6년, 고등과(高等科) 2년이다.

성산초등학교 향토지에 따르면 이 학교는 나중에 성산리 174번지로 이전하였다고 하였다.

이 학교에 한국인은 다닐 수 없었고 고성리에 있는 성산포서공립국민학교(現 동남초등학교)에 통학하였었다.

다만 1930년대 후반에는 기부금을 내는 조건으로 한국인을 7,8명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는 고등과에 진학하는 일본인 학생이 줄어들자 고등과 존치를 위한 전략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광복 직후 성산리에도 학교를 설립하자는 결의를 가지면서 1946년 1월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내었다.

성산초등학교 향토지에 따르면 1946년 2월 성산리 173-1번지(속칭 통발알 옆)에서 성산동공립국민학교를 개교하였다고 하였고 게재한 사진도 현재 남아 있는 건물과 같으나 현재 건물이 남아 있는 땅은 성산리 179-4번지이다.

1950년 10월 성산동국민학교로, 1957년 6월에는 성산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72년 12월 성산리 114번지 현재 일출봉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으로 이전하였다.

현재의 자리 성산리 333번지로 옮긴 것은 1988년 10월이다.(성산초등학교 홈페이지 학교 연혁, 성산초등학교 향토지)

성산리는 4·3 당시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성산동교를 접수하여 3개월(한라일보에는 1년 정도라고 기록) 정도 주둔하였다.

규모와 주둔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00여명의 군인들(한라일보에는 이북말을 쓰는 50여명의 군인들)이 주둔했다는 증언이 많다.

구좌면 월정리의 구좌중앙국민학교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의 일부가 성산리로 이동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성산동교 건물에 주둔하면서 숙식을 해결했고, 붙잡아 온 주민들을 수감하고 취조하는 곳은 성산동교 바로 앞 담장 너머에 있었던 감자창고를 이용했다.

일제 때부터 있었던 주정공장에 딸린 창고를 학교 담을 허물고 출입을 용이하게 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당시 이 곳에 몇 번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이기선씨(81)는 "그들은 사람을 데려오면 무조건 때려놓고 취조를 시작했다."며 "심지어는 성산 사람 하난 죽이러 가면서도 걷지 못하니까 단가에 들러가서 죽였단 말이여. 그렇게 취조를 해놨으니까…."라며 자신도 지금 고문후유증이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여성들의 수난에 대해서도 말했다.

"잡아오면은 그 간수들이, 감시허는 놈들이 마음에 맞으면 끌어다가 무조건 강간해 놓고 돌려보내지 않고 쏘아 죽였다는 그런 말도 들었어. 일단 그 여자들은 나가면은 들어오진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장소는 어디서 죽였는진 모르고. 하여튼 수마밑에 광치기 있는 데 하고 우뭇개 정도죠."

현재 성산리는 해안도로와 갑문도로가 있어 다른 지역으로 통하기 쉽지만, 일제 말엽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혔었다. 즉 고성리에서 성산일출봉으로 이어지는 '터진목'의 좁은 길만 막아버리면 오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성산리에는 4·3 초기에 한번의 지서습격이 있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고, 그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을 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서청특별중대의 무자비한 폭력은 성산면과 인근 구좌면 지역 주민들에겐 치 떨리는 악몽의 연속이었다.

툭하면 잡혀가 갖은 고문과 곤욕을 치렀는가 하면,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산면 일대를 관할했던 서청특별중대는 잡아 온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가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는 성산리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다.

때문에 성산리민들은 날마다 잡혀온 주민들이 고문 받는 비명소리를 듣고 총살당한 시체의 모습을 보는 게 일상사였다.

성산면의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은 인근 지서에 끌려갔다가 성산포에 주둔하던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오거나, 토벌대의 포위 습격에 걸려들어 역시 서청특별중대에 끌려와서 고문 취조를 당하다 터진목에서 총살됐던 것이다.

이 곳에서의 희생은 성산면 주민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인근 지역인 구좌면 하도, 종달리 등에서 붙잡혀온 주민들이 희생된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48년 11월 28일, 18세 이상 80세 까지의 하도리 주민들을 도피자 가족이라는 죄명으로 감자창고에 감금 시켰다가 다음날인 29일 주민 20여명을 터진목에서 집단총살하였다.


1960년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보고된 당시 성산면 유족들의 신고를 보면 서청특별중대의 무소불위의 권력과 횡포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조리 출신의 고태현씨는 1948년 10월, 9연대 11중대에 끌려가 수감 중 무죄로 석방되어 의용대에 근무하며 충실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특별중대는 과거에 수감되었다는 이유로 감자창고에 끌고가 고문을 가한 후 1949년 1월 2일, 일출봉 우뭇개동산에서 총살했다. 당시 학살집행자는 김우희 서청중대장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외에도 그들은 도피자 가족, 고기잡이용 다이너마이트 소지, 인민위 명단에 기록,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은 죄 등 갖가지 죄명을 붙여 선량한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당시 성산면 유족들은 신고한 바 있다.

신고서에 나타난 유족들의 요망사항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서청악질을 조사하고 엄벌하여 불쌍한 영혼들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애절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제주4·3유적Ⅱ 413∼414쪽, 한라일보 2007년 5월 1일)

위의 사진은 2007년 5월에 한라일보가 게시한 사진인데 지붕에 아직 기와가 많이 있었지만, 2007년 10월 30일 찍은 아래 사진은 2007년 9월 16일의 태풍으로 반 이상 무너져 없어졌다.

2014년 5월 현재는 지붕에 기와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건물 내외부에 여러 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어 건물이 거의 가려졌다.


2015년 다른 건물을 지으면서 완전히 철거되었다.
《작성 071030, 보완 1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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