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무장대 습격대비..유수암리 정주왓성
상태바
[향토문화]무장대 습격대비..유수암리 정주왓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6.26 0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의 대부분은 과수원이나 농경지를 조성하면서 훼손됐다

유수암리 정주왓성
 

위치 ; 애월읍 유수암리 2026번지 및 1955-1번지 '왕돌'(오방석 중 북쪽 돌) 동쪽 집 울타리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마을방어성)
관련 사건 ; 4·3 제주민중항쟁

 

유수암리 주민들은 소개 다음해인 1949년 봄 경에 장전리로 올라와 생활했다.

그 후 주민들은 장전리에 함바를 지어 장전리, 소길리 주민들과 함께 약 10개월 정도 생활하다 유수암리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유수암리를 두르는 성을 쌓고 마을에 돌아온 것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1949년 가을에서 겨울 경이었다.

마을 동쪽 입구 동문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표석에는 '1950년 돌아와 마을을 재건할 때 돌성을 쌓고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달아 출입을 통제하고 포대를 지어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여 밤낮으로 경계 근무를 섰던 곳으로 우리 마을의 고통과 애환이 서린 곳'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당시 쌓았던 성은 동쪽으로는 현재 동문지(東門址)가 있는 속칭 양태머를 608-1 임(林) 번지를 시작으로 남쪽으로 현재 강술생씨 집이 있는 1838번지를 거쳐 일명 정주왓으로 불리워지는 1955-1번지와 물우초왓 1972번지의 서문, 그리고 현재 성터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북문 쪽의 정주왓 2026번지로 이어져 유수암리 본동 거의 전부가 성안에 들어갔다.

당시 성의 높이는 2.5m 이상으로 높게 쌓았었다고 주민 강동희(남, 2003년 67세)씨는 증언했다.

당시 성의 대부분은 과수원이나 농경지를 조성하면서 훼손됐다. 현재 마을에 남아 있는 성 터는 당시 북문 쪽 정주왓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던 곳으로 길이 500m, 높이는 2.3∼2.5m 정도이다.(제주4·3 유적Ⅰ 674∼675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