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난징포격 중간기착지..상모리 알드르비행장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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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난징포격 중간기착지..상모리 알드르비행장활주로
  • 고현준
  • 승인 2019.07.0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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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발한 주거지·농지·목장 등 20만평 완공..45년에는 80만평 차지

상모리 알드르비행장활주로
 

알드르비행장활주로
위치 ; 대정읍 상모리 일대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군사시설(군용비행장)


 

위 사진 ; 모슬봉에서 본 알드르비행장 활주로(햇빛 비치는 곳)
아래 사진 ; 비행장 내 관제탑에서 본 활주로

 

제주도는 일본 남단의 규슈(九州) 지방과 중국의 남부를 연결하는 직선상에 있고, 필리핀과 한반도 사이에 있어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여건을 고려할 때 한국·중국·일본 세 지역의 중심부 해상에 놓여 있다.

따라서 제주도는 동북아시아 세 나라에 있어서 군사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도에서도 대정읍 지역은 중국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고, 태평양에 붙어 있으며, 지역이 광활하여 비행장으로 알맞고, 바로 동쪽의 화순 앞바다는 수심이 깊은데다 자연적인 항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최적의 군사요충지였다.

일본은 제주도를 중일전쟁 때에는 대륙 침략 전쟁의 전진기지로, 전쟁 말기에는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거점(결7호 작전 참조)으로 이용하였다.

알드르비행장은 서기1926년에 계획하여 1935년에 만든 왜정시대의 비행장으로 주민들로부터 징발한 주거지·농지·목장 등을 이용하여 20만평으로 완공하였다.

그러나 1937년부터 확장을 계속하여 동으로는 섯알오름, 서로는 하모리 시가지, 남으로는 바닷가, 북으로는 일주도로에 이르는 평야지대까지 1945년에는 80만평을 차지했었다.(4·3 장정6. 109쪽)

시설로는 격납고 20개, 대공포탄 탄약고 2개, 송악산과 해안에 땅굴 2개, 막사 2동, 오무라병사(大村兵舍) 등이 있었다.(제민일보 1994. 10. 20.)

지역 주민들은 원래의 지명을 따라 '알드르 비행장'이라 하고, 일본인들이 부르던 이름은 '오무라(大村)비행장'이다.

비행장 건설로 알드르에 있던 마을들을 소개하는 바람에 알오름동·저근개·골못·광대원 등의 마을이 폐동되어 버렸고, 그들은 쇠머리동네(멜캐)·상모리·사계리·산이물(산이수동) 등지로 옮겨 살았다.

다음은 당시 알오름동에 살았던 임창수씨(1993년 당시 68세)의 증언이다.(4·3 장정6. 102∼103쪽)


"산이수동은 마을이 두 개였어. 산이수동 마을 서쪽(오름 서쪽)에 한 28호에서 30호 정도 사람들이 살아났주. 그곳이 산이수동 본동이었어. 거기 살다가 왜놈들이 와 가지고 굴 파고 폭탄 막 데며(쌓아) 놓으멍 비행장 만들젠 소개시켜 부니까 그 후엔 사람들이 안 살았주. 우리가 8살쯤 때난 마을 없어진 지가 한 62년 되었어.


우리 땅도 3천평 넘게 비행장에 들어가 버렸는데 그 땐 왜정 때라서 보상도 잘 아니 주었어. 내가 어린 때였는데 밭이 피해를 보게 되니까 보상금을 받아가라고 해서 가니까 그 때 보리 서말쯤 줘실 거라. 그것도 우리가 공출낸 보리로. 그 때 왜놈이 땅을 빼앗아 부니까 이젠 국가 땅이 되어 버린 거지. 우리 나라가 생겼주마는 우리 땅이라도 못 찾는 거주."

이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서 도민을 강제노역에 동원했음은 물론이다. 정드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을 만들 때에도 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잔디를 몇 장씩 할당하여 수십 Km를 잔디를 등에 지어 날랐다고 하는데 알드르비행장 공사 때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군은 '정부는 전시에 제하여 국가총동원상 필요가 있을 때에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제국 신민을 징용하여 총동원 업무에 종사케 할 수 있다'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그들 마음대로 노동력을 징발하였던 것이다.


"비행장을 만들 때에는 대정 사람들뿐만 아니라 남군·북군 사람들까지도 다 동원되었어. 16살부터 60살까지 뽑아갔는데 게 중에는 규정하는 나이보다 어린 아이들도 있었어.(나중에는 12세부터 70세까지로 대상을 늘였음) 무조건 일년에 두 번이나 세 번 석 달에 한 번씩 뽑아서 나가. 석 달 동안 일하면 석 달 쉬어서 또 가곤 했어. 가서 굴도 파고 비행장 바닥을 고르기도 했어. 지금의 비행장 바닥은 그 때 우리가 흙을 파고 평평하게 다져서 그 위에 테(잔디)를 입혀서 만든 거라."(1993년 보성리 거주 89세 박경옥씨 증언) (4·3 장정6. 110쪽)


활주로는 하모리 마을 옆에서부터 상모리 바닷가까지이다. 당시 활주로는 잔디를 입혔었다. 필자의 선친(1934년생)의 증언에 따르면 정드르비행장을 만들 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삼양국민학교에서 가로30cm×세로30cm 짜리 잔디 2장을 등에 지고 비행장까지 걸어가서 공출했는데, 이 때 1학년은 1장,… 6학년은 6장을 공출했다고 한다. 이곳 알드르비행장 건설 당시에도 이 지역 주민, 학생들이 잔디를 공출했을 것이다.


강제징용되어 온 도민들은 공사장 근처에 만들어진 〈함빠집〉(가건물)에 살며 힘든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아침 8시에서 저년 5시까지 굴을 파거나 흙을 나르고 시멘트 나르는 일을 했다. 또한 식량의 절대부족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주민들은 혹독한 노동을 이기지 못하여 죽은 경우도 많았다.


"송악산에 동원됐을 때는 집에도 못 왔어. 함빠집이라고 마치 닭장 모양으로 나무로 길쭉하게 집 같이 지어서 그곳에서 살았지. 지금 산이수동 서쪽에 지었지. 새(띠)를 비여다가 노람지(낟가리 덮개)를 엮어서 덮었는데 비가 오면 줄줄 새지. 보통 함빠집 하나에 1개 부대 약 100명이 살았으니까 그곳엔 천몇백명이 살았어. 그 중에서 비행장에 가서 일하는 사람, 굴 파러 가는 사람, 목수일 하러 가는 사람들을 따로 분류해서 보내지. 일본놈들이 전부 십장질 하고."(1993년 하모리 거주 67세 고춘언씨 증언) (4·3 장정6. 110∼111쪽)

1937년 일본이 중국 난징(南京)을 폭격할 때에도 이 비행장이 이용되었다. 1937년 8월 15일 오전, 난징에 거주하던 마지막 일본인 거류민단과 난징 대사관 직원들이 톈진-포구를 잇는 진포선을 타고 칭따오를 향해 출발했다.

이들 일본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노가 심하여 이들이 해를 당할 것을 우려하여 중화민국 정부는 특급열차를 준비하는 한편 40명의 헌병과 2명의 외교부 장교를 수행시켜 이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이들이 떠난지 불과 3시간 후인 오후 2시 50분, 일본 해군 기사라즈 항공대 소속 96식 육상공격기 20기가 난징을 공습하기 시작했다.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난징 폭격은 해군 차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주도하였으며, 난징 폭격을 담당한 기사라즈 항공대는 8월 15일 오전 9시 10분, 나가사키 오무라 기지에서 발진하여 960키로미터를 4시간 동안 비행하여 난징을 폭격하였고 알드르비행장은 돌아오는 길에 중간기착지로 이용하였다.

일본 해군은 당시 최신형이자 항속거리가 뛰어난 96식 육상공격기를 사용해 8월15일부터 난징에 대한 도양(渡洋)폭격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일본 나가사키 현의 오무라(大村) 항공기지에서 출격해 폭격했지만, 귀착지는 제주도 항공기지였다.

당시 일본에서 중국 중부에 가장 가까운 장소가 제주도였기 때문이다. 이후 제주도 항공기지에 오무라 해군 항공부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난징, 상하이 등지에 대한 도양폭격 거점도 제주도로 옮겨졌다.


이 폭격에 대해
난징시는 8월 15일부터 10월 15일까지 공습 65회, 시민과 군인 392명 사망, 438명 부상, 가옥 1천 949칸 파괴라고 발표했고,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해군항공대는 11월 15일까지 26회의 공습, 600기의 비행기를 공원해 300톤을 투하했으며 12월 13일 난징 함락까지 공습 50여회에 걸쳐 900여기의 항공기를 동원해 수백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고 하였다.(위키백과, 한겨레)


1961년에는 내도했던 박정희 의장이 이 비행장을 이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은 「耐乏生活로 再建」이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1961년 9월 9일 기사이다.


“「耐乏生活로 再建」-朴議長 濟州道民歡迎式서 强調- 【濟州】國家再建最高會議議長 朴正熙將軍은 8日 下午 濟州國民學校(濟州北國民學校의 잘못인 듯)에서 열린 歡迎式에 參席하고 ”國家再建은 僥倖과 奇蹟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全國民이 一致團結해서 勤勉과 耐乏生活을 繼續해 나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朴議長은 이 날 上午 特別機便으로 初度巡視次 來道하여 道廳에서 道內狀況報告를 들은 다음 忠魂墓를 參拜하고 港灣施設 等을 視察 萬餘名이 모인 歡迎式에 參席한 것이다. 朴議長은 이 날 西歸浦에서 一泊한 後 9日 下午3시 모슬飛行場을 出發 歸京할 豫定이다.”(경향신문 610909)

언론 보도(제민일보 1994. 5. 23)를 보면 제주도에서 근무했던 일본 공군 '가미가제 특공대' 출신 장교들이 모여서 정기적으로 자신들의 주둔지였던 대정읍 지역을 방문하면서 대정초등학교에 돈 백만원을 기증하고 환영회를 열어 줄 것을 요구했는데 대정초등학교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들의 주둔지 방문은 1976년 6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남제주군지 824쪽에 「1976. 6. 5. 일본 공군에 있던 20명의 일본인, 32년만에 옛 주둔지인 모슬포비행장 방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일본은 아직도 군국주의 시대의 망령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성 080105, 보완 140528, 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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