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 최초 여자 유배인..화북2동 대비터대비폭낭(대보도폭낭)
상태바
[향토문화]제주 최초 여자 유배인..화북2동 대비터대비폭낭(대보도폭낭)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7.24 08: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안(延安)김씨문중에서 송당리 대천동 인근에 노씨 대비공원을 만들었다

화북2동 대비터대비폭낭(대보도폭낭)
 

위치 ; 화북2동 3587-1번지.
시대 ; 조선
유형 ; 적거지

 

 


조선 선조의 두 번째 부인인 인목대비의 어머니 광산부부인 노씨가 제주에 유배 와서 살던 곳을 '대비터', 그곳의 팽나무를 '대비폭낭' 또는 '대보도폭낭'이라고 한다.

폭낭은 팽나무의 제주어이다. 역사적인 고증자료는 없지만 지금도 화북동 거로 마을에서는 대비터, 대비폭낭이라고 부른다.

그 곳의 폭낭은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에 나무 중심에서 서쪽 가지가 부러져서 동쪽 가지만 남았다가 2002년 태풍 루사에 의해 남은 부분도 모두 부러져 죽고 그 자리에 다시 심은 폭낭이 자라고 있었으나 최근에 없어졌다.

동네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비폭낭에서는 아이들이 올라가 놀다 떨어져도 다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 원로들은 좁은 공회당보다는 이 폭낭 아래에서 모여 놀기도 하고 마을 대소사에 대한 논의도 하였는데 여기서 논의된 사항은 분문률로 여길 정도로 나무를 신성시 했다고 한다.

태풍에 이 나무가 부러졌을 때에는 신이 깃든 나무라 하여 선뜻 치우지 못하다가 동장 직인을 찍은 관명이라는 부적을 붙여 제를 지내고 불태웠다고 한다.(2018년 거로부록마을지)


노씨부인(盧氏夫人)은 광해군8년(1616) 10월에 제주에 안치되었다. 광해군5년(1613) 6월 이이첨과 정항 등이 모의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죽였다.

김제남과 그의 아들 3형제도 죽음을 당하자, 김제남의 부인은 살아남은 어린 손자 김천석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손자가 급사하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는 관에 넣어 선영에 거짓 장사지내고 절에서 숨어 살게 하였다.


1616년에 이르자 이공헌, 박몽준 등이 상소하여 노씨 부인마저 죽이도록 상소하였으나 인목대비는 호를 깎아서 서궁이라 칭하고 유폐시켰으며 생모는 제주로 유배하였다.

1618년 10월 노씨부인 일행은 해남을 출발하여 보길도를 지나 추자도를 거쳐 조천관으로 들어왔다.(여자로서는 최초의 제주도 유배인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광해10년 10월15일)에는 金悌男妻盧氏于濟州 傳曰 悌男妻配所下去時多定軍士堅守押送(김제남의 처 노씨를 제주에 유배하였다. 전교하기를 제남의 처가 유배지로 내려갈 때 군사를 많이 배정하여 굳게 지켜 압송하도록 하라)라는 기사가 있다.


당시 제주목사 양확(梁濩)(濩=퍼질 호, 낙숫물 떨어질 확)은 대북파의 눈에 들기 위해 노씨 부인을 학대하고 힘든 일을 시켰으나 보수주인(유배 죄인을 맡아 있는 주인) 전양(全良)은 대신 자기 아내에게 그 일을 시켜 노씨 부인을 돌보았다.

그러나 양확은 그녀에게 줄 식량도 주지 아니 하므로 생계가 막연해진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술을 빚어 목숨을 연명하였다.

그녀가 빚은 술은 당시 상류 사회에서나 맛 볼 수 있는 술이었으므로 제주목성내의 풍류객과 애주가들이 대비 어머니의 술맛이 최고라는 극찬을 하였다.(실제로는 술지게미로 빚은 막걸리 비슷한 술로 대비모주, 모주라고 불리었다고 함)


이러한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생활속에서 5년이 흘러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곧 승지 정립과 예조 참의 목대흠과 내시 김충립 등을 보내어 모셔갔다.

한양으로 돌아간 그녀는 인목대비를 만나 그 동안의 서러움을 서로 위로하였다. 그리고 숨어 살던 손자 김천석을 불러들이고 김제남의 사당을 만들어 모시게 하였다.

이때 전양도 같이 갔는데 특별히 그에게 첨사(僉使)라는 무관 벼슬이 내려졌다. 한편 양호 목사는 탐학하게 뇌물들을 긁어내고 기생의 두 발을 자른 잔학한 죄를 물어 도사 남일을 보내어 목을 베었다.(증보판 제주통사)


연려실기술 계해정사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附夫人之定配濟州時 牧使梁濩承望賊臣之志虐使夫人十倍於官屬不勝支當 其所處之家主全良每使其妻過半代行以此幸保軀命 癸亥反正初 上特遣禮官中使陪來 又令三道監司護行時全良亦陪來特除僉使以賞其勞 濩則卽遣假都事南佾就其所在梟示籍産 一國臣民無不快之〉

(부부인이 제주에 귀양 가 있을 때 목사 양확이 적신의 뜻을 받들어 부부인에게 관속보다 10배나 더 혹독한 일을 시키니 견디어내기가 어려웠다.

부인이 거처하는 집 주인 전량이 항상 그 아내를 시켜 과반이나 대신 행하도록 하여 몸과 목숨을 다행히 보전하였다.

계해년 반정 초에 임금이 특별히 예조참판과 내시를 보내어 모셔오게 했으며 3도의 감사로 하여금 행차를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 때에 전량이 부부인을 모시고 왔는데 특히 첨사로 제수하여 그 공로를 상 주는 한편 즉시 가도사(임시도사) 남일을 보내어 양확을 그 자리에서 목을 베고 재산을 몰수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濩待之無狀 夫人鬻酒以爲延命 濩乘醉至令下隸曰取大妃母酒 以來事多如此〉

(양확이 부인을 심히 학대하였다. 부인이 술을 팔아 목숨을 연명하였는데 양확은 술이 취하면 심지어 종들에게 ‘대비어미술을 가져오너라’라고 하였으니 모든 행동이 이와 같다.)


노씨부인이 제주를 떠나는 모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권23) 계해정사(癸亥靖社)에 遣承旨鄭岦禮曹參議睦大欽中宮金忠立於濟州 陪來光山府夫人旣復命 大妃上岦以寶劍 盧夫人在謫十餘年望絶生還 一日鵲飛到簷 前語査査不已 夫人歎曰家破人亡有何喜事蓋鵲非海島所有人皆異之俄傳承旨爲迎夫人來泊朝天館船發海南時有鵲飛坐檣竿將近津頭忽然南翔而先使者報喜也

(승지 정립, 예조참의 목대흠, 중관내시 김충립을 제주에 보내어 광산부부인을 모셔오게 하였다. (모셔왔음을) 복명하자 대비가 정립에게 보검을 주었다.

노부인이 10여년을 유배지에서 생활하는 동안 살아서 돌아갈 희망을 아예 끊었는데 하루는 까치가 처마 끝에 날아와서 까악까악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부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집안이 망하고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기쁜 일이 있을까 보냐 하였다. 까치는 바다 속 섬에 있는 새가 아니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더니 갑자기 승지가 부인을 영접하기 위하여 조천관에 배를 대었다는 전갈이 왔다.

해남도를 출발할 때 까치가 돛대에 날아와 앉았다가 나루(포구)가 가깝게 되자 홀연히 남쪽으로 날아갔는데 사자보다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위 사진에 보이는 대비폭낭은 2008년말쯤 베어 없어졌다.
2000년 경 연안(延安)김씨문중에서 송당리 대천동 인근에 대비공원을 만들었다.
《작성 2008-01-26, 보완 2016-12-30, 18092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