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길이가 긴 목장..송당리 장기동마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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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길이가 긴 목장..송당리 장기동마을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8.03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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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동 장터'라는 마을이름은 조선시대 이 근처에 국마를 키우던 1소장이 있었기 때문

송당리 장기동마을터

위치 ; 구좌읍 송당리 2405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잃어버린마을

 


송당은 주변 17개의 오름으로 둘러싸인 산간 마을이다. 4·3이 일어나기 전에는 마을 중심부에 상동, 중동, 하동이 있고, 주변에 장기동, 알손당, 너븐밧, 가시남동, 대천동 등 여러 개의 자연 마을을 거느리고 있던 큰 마을이었다.

마을이 한라산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4·3 초기에는 무장대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 그러다가 1948년 11월 22일에 이르러 군경토벌대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사전에 초토화계획이 알려져 주민들이 모두 대피했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 비해 큰 인명피해는 없었다.


1949년 5월 29일 본 마을은 복구되었지만, 장기동, 알손당 가시남동, 너븐밧 등은 복구되지 못했다. 대천동 입구에서 동북쪽으로 난 삼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가면 길 오른 쪽에 장기동 마을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눈에 들어온다.

'장기동(長期洞)' 혹은 '장기동 장터'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시대 이 근처에 국마를 키우던 1소장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굳이 해석하자면 다른 목장에 비해 '길이가 긴 목장이 있던 터'라는 의미다.(오마이뉴스 장태욱 2008-04-29)


장기동은 4·3 당시 오군백, 강군삼, 김두백, 홍기삼, 고은국, 고일용, 고태권, 김봉진, 이하옥, 김두향, 오원권 등 약 15호 80여명의 주민이 살았던 곳이다. 1948년 11월 22일 군경토벌대는 장기동 마을을 포함한 송당리 전지역을 초토화하였다.

이후 어려운 피난생활 과정에서 희생당한 주민들도 많았다. 1949년 5월 하순 이곳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송당리 주민들이 송당리가 재건되면서 모여들었다. 하지만 원래 살던 장기동은 본동과 멀리 떨어져 있어 당장 복구되지 못했다.

사태가 완전히 평정된 후에도 송당리 본동 및 피난지에서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민들이 돌아가지 않아 잃어버린마을이 되고 말았다. 마을이었던 곳은 현재 송당목장 부지에 편입되어 있고, 주거의 흔적은 드물게 보이는 대나무숲이 있을 뿐이다.


특히 장기동은 최후까지 산에서 생존했던 무장대원으로 알려진 오원권의 고향이다. 그는 초토화 이후 해안마을로 피신했다가 입산한 후 토벌대의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귀순을 거부하다가 최후까지 살아남았는데 1957년 4월 2일 장기동 인근에서 생포되었다.(제주도/제주4·3연구소, 제주4·3유적Ⅰ. 2003. 545~546쪽)


당시 오원권에 대해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다.


〈지난(1957년 4월) 2일 경찰토벌대에 의하여 생포되기까지 만 9년 동안 제주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여 암약하던 최후의 재산 공비 오원권(吳元權․39)은 (1957년 4월) 9일 하오 현지 경찰에 의하여 치안국으로 압송되어왔다.

한편 오(吳)는 지난 27일 자수하려고 산에서 내려왔던 일도 있었다고 하며 오의 가족들의 지성 어린 공작으로 종시에는 자수할 기회를 얻게된 것이라고 한다.(조선일보 570410)


〈지난 9일 서울로 압송되어 그동안 치안국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제주도 내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재산공비 오원권(吳元權․39)과 한순애(韓順愛․23) 양인은 당국의 관대한 포섭 조치에 의하여 12일 밤 10시 열차편으로 고향인 제주도로 색다른 금의환향의 길을 떠났다.

이들은 수도 서울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고 또한 당국의 뜻하지 않은 후대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고 뉘우치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는데 12일 치안국에서는 “이들을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불구속으로 검찰청에 송청하되 기소유예 의견으로 관대한 조치를 취하라”고 현지 경찰에 통지함으로써 이들에게 색다른 선물을 보내었다고 한다.

한편 오(吳)는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에서 또한 한(韓)은 북제주군 조천면 조천리에서 가족들과 농사를 지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조선일보 570413)

조선일보는 이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연재했는데 오원권에 대한 기사는 14일과 15일에 게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일보 1957년 4월 14일


△ 오원권의 얘기


그는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송당리에서 돌을 캐내어 밭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던 농부였다. 가난하나마 그 당시 칠순이 넘은 부친과 아내, 그리고 생후 8개월 되는 맏아들과 함께 오순도순 평화스럽게 사는 농부였다.

그런데 1948년 봄 4․3사건으로 제주도에 붉은 폭동이 있은 후 산간마을인 송당리, 그 중에서도 본 마을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오씨의 집은 늘 공비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 해 가을 군경합동토벌대가 작전을 개시하여 공비소탕전을 시작했을 때 송당리 부락은 포화에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때 오씨는 아내를 잃었다는 것이다.

토벌대가 본 기지로 철수할 때 전 부락민은 토벌대의 명령에 의해서 정든 집, 땀흘려 가꾼 곡식을 버린 채 소개를 당하여 평지로 내려는 왔으나 당장 먹을 것도 없고 추운 겨울을 앞에 두고 입을 것, 덮을 것도 없는 알몸으로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오씨 등 장정들은 부모 처자들의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처참한 정경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다 못하여 오씨는 토벌대의 양해를 얻어 옛 집터를 찾아가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면 거둬 가져올 것을 결심하였다. 이것이 그가 공비생활을 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찾아가는 양식의 구득행위였다.


옛 마을을 찾아가니 옛 모습은 찾을 길 없고 잿더미가 된 집터는 황량한 폐허인양 오씨를 맞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법률이, 즉 대한민국의 권위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공비가 벌써 그곳에 내려와서 제 세상인양 활개를 치고 시뻘건 눈을 휘둥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씨는 그곳에서 공비들에게 붙잡혔다.

공비들은 오씨에게 “경찰토벌대하고 함께 도망간 놈은 반역자”라고 협박을 가하면서 자기들하고 행동을 함께 하지 않으면 목숨을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다. 공비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고 오씨는 홀몸. 그곳에서 버틸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오씨는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밑에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늙은 부친과 핏덩이 같은 아들이 눈앞에 가물거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 죽는다는 것 앞에서는 부모보다도, 아들보다도 목숨이 더 아까워졌다”고 감회깊게 말하였다.


그때부터 그러니까 1948년 가을부터 오씨는 공비가 된 것이다. 공비가 된 오씨는 그날부터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공비들의 소위 책임부서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씨가 맡은 일은 식량보급이었다. 보리와 조를 짊어지고 한 달에도 몇십 번씩 자리를 옮기는 공비생활을 하였다.

끊임없이 번쩍거리는 공비간부들의 감시의 눈초리와 언제 어느 때에 당할지는 알 수 없는 경찰토벌대의 작전에 떨면서 그는 그저 목숨의 지속만이 큰 과업이 되었다. 공비들은 항상 “경찰토벌대에 잡히기만 하면 당장 총살된다. 그것뿐인가?

공비들의 가족은 경찰에 의해서 모두 학살당했다”고 말해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증오심도 컸고 따라서 귀순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씨는 산중생활에서 듣고 보고 체험한 재산공비들의 생태에 대해서 “그곳에 있으면 배고픈 것, 추운 것, 그리움 같은 것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여하튼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 전부니까요. 공산주의를 믿고 인민을 살린다는 신념도 거의 없어집니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 되겠다는 막연하지만 간절한 원망이 전부입니다”라고 제주도 사투리에 공산당식 웅변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오씨의 말로는 “경찰이 무섭다고 생각하기 전에 경찰은 이미 생명의 적으로 알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6․25사변이 일어나기까지 오씨는 분산된 한 그룹에 편성돼서 오늘은 이 산봉우리, 내일은 저 산봉우리로 떠돌아다니며 말을 잡아먹으면서 살았다는 것이나 여기에서 오씨는 제주도에서는 산에만 들어가면 먹을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소와 말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고기는 실컷 먹었다고 고소를 짓는 것이었다.

본래 제주도는 목장지대로서 해방 전까지 방목되던 소와 말이 많았던 것인데 4․3사건 때 공비들이 산에서 준동하자 주인들이 찾아가지를 못한 채 야생동물화되어 산림지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소와 말은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오씨는 6․25사변 전까지는 그다지 많은 고생은 하지 않았고 또한 6․25사변 중에는 매우 좋은 환경(?)으로 지냈다고 말하면서 사변 전에 분산되어 행동하던 공비들이 6․25사변 후 다시 집단적으로 경찰과 대전할 기세를 갖추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6․25당시 공비들은 민가에서 빼앗아온 것들 중에서 찾아낸 신문 잡지 등으로서 전세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하고 민간인들에게서 직접 들을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6․25사변 후 한 1년 동안은 공비들은 안온한 상태 하에서 편안히 쉬면서 “때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오씨도 그때는 귀순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씩 “아들놈의 얼굴이나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그는 겸연쩍은 듯이 말했다.

그러나 6․25사변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전환되자 60여 명에 달했던 당시의 재산공비 전원들은 당황한 기색으로 또다시 경찰을 습격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강도행위를 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오씨도 그때부터 약 1년 동안 총을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씨는 “경찰과의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나는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고 그저 경비나 서고 했을 뿐이라”고 외면을 하는 것이었다.(계속)(조선일보 570414)

∎ 조선일보 1957년 4월 15일


한라산 공비 회견기(2) / 입산경위와 산중생활을 중심으로 / 지금 생활은 정말 꿈 / 이성(異性)에 대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6․25사변 후 경찰토벌대의 끊임없는 토벌작전에 의해서 재산공비들이 거의 소멸될 상태에 놓여졌을 때 오씨는 같은 그룹의 네 명과 함께 거의 1년 동안을 지내게 되었으나 2~3일씩 굶는 것은 예사로 담요 한 장으로 눈 속에서 지내는 모진 고생 속에서도 경찰에 잡히기만 하면 죽는다는 말에 도망칠 염의조차도 못냈다고 말하고 나서 “어떤 때는 산에서 민간인을 만날 적이 있는데 그때는 참 반갑습니다. 민간인에게서 세상소식도 듣고 담배도 얻어 피우고 하는데 그때 피우는 담배맛이란 참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라고 말하며 앞에 내놓은 담배 한 개피 피워 무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씨는 “정말 경찰에서 잡히기만 하면 죽인다는 사실을 보았느냐?”는 물음에는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 소식을 못 들었으니 학살당한 것으로 알았고 경찰토벌대의 소탕전에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것을 보고서는 경찰이 무섭기만 해지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경찰에 학살당했으리라고 생각되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자식을 생각하고 그지없이 경찰을 미워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눈앞에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이 모든 것을 앞서기 때문이겠지요.

한번은 배가 너무 고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경찰토벌대가 작전을 개시해서 배고픈 것도 다 잊어버린 채 산길 50리를 하룻밤 사이에 도망친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겨울이었는데 들어있던 천막을 들춰 매고 정말 무슨 힘으로 그렇게 달아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해집니다.

경찰대의 공격이 심하면 심할수록 고생이 모질면 모질수록 살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커가고 그러니까 더욱 강인(?)해지고 더욱더 의지가 굳어지더군요”라고 말하며 공비들이 지니고 있는 심리상태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단 네 명이 한라산의 골짜기 봉우리를 쫓겨다니면서 한 해가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갈 무렵에는 차차 마음의 중심을 잃기 시작하여 금년 들어서부터는 세상이 그리워져서 세상에서 마음놓고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하고 늘 궁리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희들 네 명 중에 한 놈은 그야말로 열성분자여서 그놈이 우리를 지휘했는데 당최 도망치거나 이탈할 틈을 주지 않아서 꼼짝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함께 고생을 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서로 상대가 무슨 맘을 먹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냈습니다”라고 오씨는 말했다.

가끔 묻는 말에 웃음을 띠는 오씨에게 “산에서도 웃을 일이 있나요?”하고 물으니 “그럼요. 사람 사는 곳에 웃을 일이 왜 없겠어요?”하며 산중에서 인간세상과 격리되어 오히려 적대하며 사는 목숨일망정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희로애락은 다 갖추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것이었다.


오씨는 웃는 낯으로 산에서의 남녀관계를 설명했는데 그곳에서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우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여자에 대해서 눈짓하나 할 수 없으며 여자의 몸에 손 한번 대볼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만약 어떤 남자가 여자공비 쪽을 유심히 쳐다만 봐도 큰일납니다. 그 사람은 당장에 여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동되고 그 다시는 여자구경을 못하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오씨는 “생각을 해보시오. 거기에 남녀간에 이상한 짓을 한다면 다른 사람은 환장을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되면 일은 마지막입니다. 규율도 명령도 다 없어지고 말테니까요. 여자에 대한 생각은 정말 꿈같은 거나 다름없지요”라고 말했다. 인간 본능의 가장 센 욕망의 하나인 이성에 대한 모든 감정을 떼버리고만 오씨에게 “지금은 어떻습니까? 돌아간 부인생각 안 납니까?”하고 슬며시 물으니 “그야 나도 사람인데”하고 머리를 긁는 것이었다.


오씨는 경찰대에 귀순한 순간부터 “죽지만 않으면 나도 버젓한 세상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을 얼마나 바랬는지 모릅니다”라고 새삼스럽게 입을 꼭 다물었다. 귀순을 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지고 무엇인가 무거운 압력을 벗어나서 속이 텅 빈 것 같다고 말하는 오씨에게 “어때요? 담요 한 장으로 눈 속에서 자던 10년 동안의 고생과 지금 이런 여관방에서 요를 깔고 솜이불을 덮고 자는 것이?”하고 묻자 “이불은 무겁군요.

아직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고 밥을 먹어도 배부른 것 같지 않고 모두가 정말인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현재의 심경을 말하고 나서 “제주도에서 경찰선생님들의 덕분으로 부친을 만났는데 그때는 꼭 생저승에서 만나는 것 같습니다. 염치없이 부친을 붙들고 막 울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씨는 귀순하려고 생각하게된 마음의 전환을 묻는 질문을 받고도 그저 아버지를 만나던 때의 일과 너무나 편안한(?) 지금의 형편을 되풀이해서 말을 하다가 재차 귀순하게된 동기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지난 3월 말경 경찰토벌대에 저희들을 지휘하던 열성분자 놈이 피살되고 나하고 이 애(한순애를 가리키며)하고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둘만 남고 보니 외롭고 무섭고…뭐 금방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제 신세가 지긋지긋하게 싫어지더군요. 그래 경찰토벌대에 귀순했습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오씨는 그 당시의 무섭고 외롭고 초조했던 상태가 되살아나는지 몸을 오싹 떨며 움츠러뜨리는 것이었다.

“그래 앞으로 어떡하실 작정입니까?” 하고 살아갈 일을 들으니 “글쎄요. 당국에서 하라는대로 하지요” 하고 무표정하게 말하고 나서 갑자기 애원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면서 “아버지하고 아들놈하고 농사나 짓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들놈은 내가 산에 붙잡혀갈 때 생후 8개월의 젖먹이였지만 지금 열살 난 큰애가 됐습니다. 빨리 보고싶구먼요. 부친은 지금 83세입니다. 부친을 모시고 아들놈하고 농사나 지어나가면서 살게 됐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고 띄엄띄엄 말하고 한숨을 푹 쉬는 것이었다.

“그전 살던 데에 농토는 그대로 있겠죠”하고 물음 반, 위로 절반 물으니 “아닙니다. 워낙 화전(火田)터라서 한 10년 동안에 아무 못쓰게 됐습니다”라고 체념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말이 다 끝나자 오씨는 또 한 개의 담배를 피워 물고 뜻모를 웃음을 어둠이 스며드는 창밖을 멀건이 내다보면서 입속으로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조선일보570415)
《작성 080206, 보완 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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