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류와 양, 아무 데나 꽂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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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류와 양, 아무 데나 꽂지 말아주세요.."
  • 고현준
  • 승인 2019.08.0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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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올레걷기)제주올레9코스, 대평포구-화순해수욕장 구간은 자연이 준 신비의 길

 

 

 

버드나무 이야기

 

버드나무를 한자로는 柳(류)와 楊(양)의 두 글자를 쓴다고 한다.

버들 류와 버들 양, 둘 다 버드나무를 뜻한다.

버드나무는 예전에는 사랑하는 남녀가 헤어질 때 여자가 남자에게 자기를 잊지 말라고 선물로 주는 나무였다고 한다.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생각해 달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버드나무를 주는 것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아무 데나 꽂지 말고 잘 키워 달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남자들은 그 버드나무를 갖고  돌아와서는 그런 여자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 곳에나 콕 찍어 심어버린다는 것.

버드나무도 위와 아래가 있어 나무가 다르게 자란다는 점이 특별하다.

남자들은 이 버드나무의 위 아래를 분명히 알수 있음에도 아무 생각없아 그냥 심어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졸 바로(올바르게) 잘 꽂아 심은 버드나무는 구짝하게(바르게) 보통의 나무(楊(양))처럼 잘 자라지만, 거꾸로 심은 나무는 가지가 흐드러진 버드나무(柳(류))로 자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류와 양의 한자의 의미는 버드나무이지만 똑같은 버드나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를 준 여성들은 나중에 그 남자의 버드나무를 보고 그 남자의 마음을 헤아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얘기다.

 

난전선생이 올레길에서 또 전해준 이야기다.

 

 

제주올레9코스는 대평포구에서 월라봉을 지나 화순 금모래해변까지 이어지는 7.4km의 올레코스 중 가장 짧은 길이다.

지난 3일, 2주전에 도착해 경탄을 금치 못했던 박수기정을 바라보았던 길..

드디어 이 거대한 바위산을 오르는 코스다.

이날 9코스 시작점에서 출발스탬프를 찍으려고 했던 난전 강법선 선생과 고광언 등 우리 셋은 올레길의 진화된 모습을 하나 더 보게 됐다.

올레스탬프가 자동 스탬프 도장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스탬프 잉크를 꺼내 찍어야 할 스탬프를 찾아 잉크를 묻히고 찍어야 했지만 자동스탬프는 그냥 누르면 되는 것이었다.

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스탬프를 찍을 때마다 안에서 이것 저것 꺼내서 스탬프를 찍고 다시 집어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싹 가셨다.

제주올레가 날마다 발전하고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 좋은 일이다.

 

제주시에서 오전 8시경 출발해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9코스 출발점인 대평포구.

날씨는 맑았지만 땡볕이 내려쬐지는 않아 더위를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9코스에서 만나는 첫 길은 그 옛날 원나라에 말을 보내기 위해 말들이 지났다고 하는 몰질(말길).

난전선생은 “이 길을 보니 예전에 걸었던 차마고도가 생각난다”며 “차마고도도 이 길과 꼭 같이 생겼다”고 했다.

촉나라 유비가 차를 마시고난 후 차맛에 빠져 보물과 차를 바꾸자고 했을 정도로..

차마고도는 이처럼 당시 도시에 차를 운반하기 위해 사천성 아안이라는 곳에서 티벳 국경까지 2백여km를 사람이 짊어지고 날랐다는 눈물겨운 길이었다고 한다.

당시 돈을 가장 많이 벌수 있는 직업이 이 차마고도를 따라 차를 나르는 일이었다는 것.

돈을 벌기 위해 12세의 아이부터, 애기를 업고 차를 날랐던 여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험해서 중간에 쉬는 일 조차도 난관이었다.

100kg이상의 짐을 사람이 직접 짊어지고 걸어가야 하기에 앉아서 쉴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팡이를 갖고 가다가 쉴 때는 앉지도 못하고 지팡이를 다리가 없는 지게 아래쪽에 대고 서서 쉬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차마고도의 돌에는 나무지팡이로 쉬기 위해 대었던 곳에 구멍이 뚫린 흔적이 남아있어 이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고 한다.

길 조차 너무 좁아 우리나라 지게처럼 다리를 만들지 못하고 니은 자 같은 지게를 지고 목숨을 걸고 다녔다는 차마고도.

 

좁아 보이는 이 길에서 차마고도 이야기를 하다가 난전선생은 문득, 돌이 가득 널린 불편한 길이었지만 맨발로 걷겠다고 했다.

박수기정을 오르고 월라봉을 지나 안덕계곡을 모두 지날 때까지 맨발로 걸었던 난전선생은 월라봉을 내려오면서 “월라봉을 맨발로 걸었던 사람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아마 세계 최초로 맨발로 월라봉을 걸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해줬다.

난전선생은 지기를 받으면서 걷다보면 몸의 나쁜 기가 다 빠져 나갈 것이라는 마음에서 맨발로 걷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중간스탬프 가까운 목초지에 도착해 쇠똥이 많이 보이자 “쇠똥에는 진드기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더니 그제서야 들고 있던 신발을 신었다.

 

제주올레 9코스는 아기자기함이 가장 돋보이는 코스였다.

처음에는 말이 다니던 말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니 산방산이 화순해수욕장과 함께 눈앞에 펼쳐졌다.

다시 좁은 길을 따라 계속 조금 더 가니 유반석이라는 전설의 바위가 우뚝 서서 나타났다.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방향에서 보면 웅크리고 앉은 짐승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이 지역 전설의 바위 유반석이다.

유반석과 무반석에 대한 홍장사의 전설처럼 이 바위상에는 앞뒤로 받침이 고여져 있어 전설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는 자연석상.

무반석을 바라보는 그 자테는 영성의 동물 하나가 산방산을 바라보며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화순리 유반석

 

다음은 화순리 유반석에 대한 고영철 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의 설명이다.

 

옛부터 화순리 동쪽 냇가 높은 언덕에 있는 큰 바위를 유반석이라 하고, 해수욕장 서쪽 바위산에 있는 큰 바위를 무반석이라 하였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동.서 동네 사람들의 신분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부터 동동네에는 양반들이 살았고, 서동네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살았었다. 동동네 사람들은 학식이 높고 지혜가 있었으나 힘이 장사인 서동네 사람들에게 늘 눌려 살았었다.

어느 해엔가 육지에서 온 신안(神眼)을 가진 이가 화순리에 들리게 되었다. 그는 동동네의 어느 집에 머무르면서 동동네의 유반들이 서동네 사람들에게 몰리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하다. 어째서 유반이 무반에게 몰리는가?'

하고 생각한 그는 일부러 더 머물면서 그 이유를 찾아 보았다. 며칠 동안을 찾지 못하다가 밤에 빛을 발하는 두 개의 바위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유반석과 무반석이었다.

두 개의 바위에서 발하는 정기가 불빛처럼 보이는데 무반석의 빛은 강한 반면 유반석의 빛은 반딧불처럼 약했다. 그는 곧 동네 사람을 불러내어 불빛을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유반석과 무반석이 정기(精氣) 싸움을 하는데 당신네 유반석 불빛이 형편없지요? 당신네들이 서동네 사람들에게 몰리는 이유는 바로 저것 때문이오."

이 말을 들은 유반들은 꾀를 내어 서동네 무반석을 쓰러뜨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이 바위는 워낙 커서 유반들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무반들의 힘을 꾀로써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동네에 장사가 나서 양쪽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장밭에 모였을 때 동동네 사람들은 서동네 사람들에게 술을 많이 권하고 그들의 힘을 칭찬하였다. 한참 추그린(치켜올린) 후에

"자네들 기운이 좋덴 허여도 요 바위사 꼬딱 못 허주이."

하고 약을 올렸다. 술이 거나한 서동네 장사들이 힘자랑을 하려고 덤벼 들었다.

"요까짓것 말이여?"

여러 장사들이 지렛대까지 동원하여 힘을 합쳐 밀어내니 무반석은 그만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순간 그 자리에서 청비둘이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가는 것이었다.

그 후로는 서동네 사람들 중에서 장사들은 하나 둘 죽어가고 다시는 장사가 태어나지도 않았다. 차차 동동네 사람들이 세력을 잡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무반들의 세력이 시들어가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유반의 술책에 넘어가서 자신들의 정기를 무너뜨리고 만 것을 안 서동네 사람들은 분개하여 일어섰다.

"저 동동네 유반석을 굴려 버리자."

우르르 달려들어 지렛대를 유반석 밑에 대고 받침돌을 고이고 힘을 썼다. 그러나 유반석은 높고 좁은 바위 위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가 없었고 장사들은 이미 다 죽어 버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만의 힘으로는 끝내 넘어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유반석은 밑굽이 들리고 받침돌까지 받쳐진 채로 남아 있다.(濟州道의 文化遺産. 197-198쪽)

유반석은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방향에서 보면 웅크리고 앉은 짐승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일부러 그런 것처럼 앞뒤로 받침이 고여져 있어 전설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 바위동물은 반대편 화순해수욕장 위 동산에 있는 무반석을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한다.

아래쪽은 낭떠러지라 바위와 함께 사진은 찍을 수 있지만 더 이상 앞쪽으로 나서기는 어려운 지형에 이 전설의 바위가 서 있어 참으로 신비하게 보였다.

월라봉을 지나는 길에서는 또 칡꽃이 피고 몇 개의 탱자나무가 보이는 곳에, 나비들이 꿀을 찾아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모습과 함께 천연 그대로인 자연의 길을 마음껏 선사했다.

월라봉에 대해 오름이야기의 김종철 선생은 “월라봉은 도래오름이라고 하며 달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며 “하늘에 좀더 가까운 곳,또는 우러러보는 곳이라는 사상적 의미가 내표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월라봉을 다 내려오자 물이 잔잔히 흐르는 안덕계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가에 계곡물이 흐르는 옆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보이자 난전선생이 계단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자고 했다.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그곳에는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작고 예쁜 다리 하나가 조용히 놓여져 있었다.

이곳을 세 번이나 다녔지만 갈 길이 바빠 스쳐 지나기만 했던 터라 나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우리는 마치 ‘콰이강의 다리’라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가 다리아래를 보며 기웃거리다가 아예 다리 한가운데 앉아 난전선생이 준비해온 수박을 먹으며 호연지기를 즐겼다.

 

이날 땀을 흠뻑 흘린 뒤 먹는 수박은 꿀맛이었다.

다리 아래로는 2-3급수 정도 되는 물이 흐르고, 멀리 계곡의 큰 바위절벽이 보이는 곳에서 신발도 벗고 편히 앉아 우리는 한참이나 그렇게 자연을 즐겼다.

계곡물이 맑아 보이지 않는 건 참 슬픈 일이다.

물이 좋았다면 물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으련만..

우리가 더럽히고 우리가 외면하는 그 자연은 또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

 

미리 내려갔던 고광언이 오래 기다릴 것 같아 우리는 일어섰고 난전선생은 미리 수박 몇 개를 다른 통에 옮겨 놓았던 터라 들길을 다 내려와서는 고광언을 보자마자 수박부터 먹으라고 전했다.

땀은 온 몸에 비 오듯 흐르고..

 

 

안덕계곡을 다 내려오자 보이는 또 다른 모습..그곳에도 거대한 주상절리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천상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이나 했을 법한 절벽 돌 바위 아래는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동그란 자연호수가 만들어졌고 이를 바라보며 걷는 길은 참으로 신선했다.

다만, 물이 깨끗해 보이지 않는 것 만이 커다란 흠이었다.

코스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도록 바뀐 9코스..

중간스탬프로 가는 이 코스 말미의 황개천 계곡의 끝에, 바다가 보이는 다리로 가기 전인 그 지점에 중간스탬프가 놓여 있었다.

 

“날씨가 더워오니 오늘은 이곳까지만 걷자”고 제안하니 난전선생과 고광언은 “걸어야 할 거리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한 1km 정도 남았다”고 하니 “그 정도면 그냥 끝까지 걷자”고 한다.

무슨 공사인지 포스코가 큰 공사를 하는 북부발전소 옆길을 지나 화순마을 어귀 엄청난 크기의 폭낭 아래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히고..

조금 더 걸어가자 화순금모래해변이 가깝게 나타났다.

중간스탬프 지점에서 단지 30분 정도를 더 걸었더니 종점에 다다른 것이다.

 

종점에 도착하자마자 수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택시를 불렀는데 택시는 1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우리는 할수 없이 셋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택시에 올랐다.

요즘 우리나라 경제상황을 걱정하는 중년의 기사는 택시에 오르자마자 큰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말했다.

“이 도로는 해군기지가 만들어질 때에 대비해 대로로 건설된 것인데..주민 몇몇이 반대해서 강정도 망하고 화순도 다 망했다”며 흥분했다.

“화순은 벌써 백년전부터 해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라 해군기지는 반드시 이곳에 건설돼야 했다”는 것으로 "마을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산방산과 월라봉 박수기정이 이곳 화순을 천연요새로 만들고 있는 곳이라 해군기지는 반드시 이곳에 만들어졌어야 했다”는 얘기다.

회순지역 주민들의 아쉬움이 크게 묻어나는 이 택시기사의 설명을 들으며 “백년대계는 이런 것인데..”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더욱 아쉬운 것은 꼭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들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위정자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소신이다.

만약 화순에 해군기지가 만들어졌다면.. 나라도 좋았고 강정도 살았고 화순도 다 좋아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몹시나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제2공항을 세우느니 다른 곳에 세우느니 하는 전쟁이 지금도 계속 중이지만 모든 정책은 백년대계의 마음으로 추진해야 한다.

제주도가 왜 제주다움을 지켜나가야 하는 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정하는 정책은 늘 실망스럽고 제주의 미래를 걱정시킨다.

모든 정책은 마을을 살리는 계획이어야지 마을을 죽이는 결정을 해서는 안된다.

구럼비바위가 그렇게 무참히 깨어져 사라지고,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가했던 국가공권력의 폭력을 일이 다 끝난 후 주민들에게 잘못됐다고 시인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제주올레는 제주도의 그런 슬픈 역사를 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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