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6.6사건..종달리 전수동마을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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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6.6사건..종달리 전수동마을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8.0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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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 주민들 마을 어귀에 소년들을 '빗개'로 세우고 토벌대의 마을 진입 경계

종달리 전수동마을성담
 

위치 ; 종달리 마을 서남쪽 일주도로에서 60여m 동쪽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종달리에서는 1947년 6월 6일 속칭 '6·6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종달리는 일찍부터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육지부나 일본으로 도망가게 되었으며, 4·3 진행 전과정을 통하여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토벌이 강화되던 1948년 가을부터 종달리 주민들은 마을 어귀에 소년들을 '빗개'로 세우고 토벌대의 마을 진입을 경계했다.

토벌대가 마을로 들어오면 주민들은 마을 위쪽에 있는 '고지된밭'에 있는 크고작은 굴에 피신했다가 돌아오곤 했다.


종달리는 무장대와 토벌대 양쪽으로부터 희생을 치른 마을이다. 주민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종달리의 축성은 다른 마을보다 비교적 일찍 시작되었다.

1948년 12월 들어 무장대의 습격으로 인명이 희생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마을 주민들은 서둘러 마을 둘레에 성을 쌓고 입구에 참호를 만들어 출입자를 감시했다.

또 밤에는 성의 요소요소마다 보초를 서고 순찰을 돌며 경비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도 범위를 넓혀 더욱 견고하게 쌓아 여자들도 밤낮으로 돌아가며 보초를 섰다. 사태가 끝나자 성담은 밭담, 집담, 산담 등으로 환원되었다.


이곳은 폭이 좁은 편이고 길이가 30여m밖에 안 되며 높이도 매우 낮아져 있다. 덩굴식물까지 덮여 있어 쉽게 알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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