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애곡요배(哀哭遙拜)..하도리 국상동산(포제단)
상태바
[향토문화]애곡요배(哀哭遙拜)..하도리 국상동산(포제단)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8.16 07: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 등 국상을 당하였을 때 한양 쪽을 향해 망곡(望哭)을 하던 언덕

하도리 국상동산(포제단)

하도리 국상(國喪)동산(포제단)
위치 ; 하도리 619-1번지. 굴동 동북쪽 500m 지점 ○○하우스 민박집 북쪽
시대 ; 조선시대
유형 ; 제단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 등 국상을 당하였을 때 한양 쪽을 향해 망곡(望哭)을 하던 언덕이다.

1926년 6월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국상일에 하도리 노인들이 흰 갓을 쓰고 국상동산에 모여 애곡요배(哀哭遙拜)했다고 한다.(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반듯하게 다듬어진 제단이 놓여 있는 둘레에는 현무암을 다듬어서 높이 2m, 두께 1m 정도로 '디귿'자 모양의 벽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트였다. 지붕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넓은 마당에는 금잔디가 심어져 있다.

오늘날에는 마을제를 지내는 포제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연말이 되면 포제 준비를 위한 ‘포젯상회(酺祭鄕會)’를 열어 제향비, 제청, 제의, 제관 선출 등에 관하여 논의한다.

뽑힌 제관들은 제청에 입소하여 3일 정성을 드리는데 예전에는 5~7일 정성을 드렸다고 한다. 정성 기간 동안에는 제청에 금줄을 펴서 부정한 자의 출입을 막고 공동생활을 한다.


제의의 대상은 포신지위(酺神之位)이며, 제물은 도(稻 흰쌀), 양(梁 좁쌀), 서(黍 기장), 직(稷 피) 네 가지였으나 요즘은 기장과 피를 구하기 힘들어 흰쌀메 2그릇과 검은좁쌀 1그릇, 노란좁쌀 1그릇으로 대신한다.

그 밖에 녹포(鹿脯, 사슴고기 말린 것. 대신 쇠고기), 해어(海魚), 과실(果實 ; 비자, 대추, 밤, 유자, 곶감, 배), 채소(菜蔬 ; 미나리, 무, 콩나물), 폐백(幣帛 ; 무명 1필, 백지 1권), 희생(犧牲 ; 얼룩이 없는 수퇘지 1마리)을 올린다.


제의는 홀기에 따라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철변두(撤邊豆), 망료(望燎)의 순서로 행한다. 초헌례는 초헌관이 술잔을 올리고 꿇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 것이다.

제의가 끝나면 희생으로 올렸던 돼지를 분육하여 참석한 사람이 모두 음복한다.
하도 마을에서는 포제를 지낼 때에 개․소․닭 소리가 들리면 좋지 않다고 믿었다.

이들 소리는 귀신을 쫓아버린다는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꿩이나 말 소리가 들리면 길조라고 여겼다.


하도리의 포제는 처음에 이곳에서 마을별로 따로 행하다가 마을의 중심이 못 된다는 일부 주민의 이의제기가 있어 각동별로 행하였다.

다시 마을의 중심지인 관전밭에서 마을별로 행하였으나 행제시 홀기 소리가 각동까지 들리지 않는다는 이의제기에 따라 부득이 1960년대 초반에는 7개 동에서 각각 따로 행제하였다.

창흥동은 ‘알어음’(1071-36번지), 동동은 ‘고마곶 포제동산’(산38-1번지), 신동은 너븐못 근방의 ‘새집동산’(1708번지), 서문동은 현재 전경대 초소막 근처의 해안(1927-7번지), 서동은 ‘큰동산’(2858번지), 면수동은 ‘양자시굴왓’(3318번지)과 ‘술왓’, 연두망 북쪽, 문도관 댁 동쪽 등지에서 각각 행제하여 오다가 1970년대 초반에 거의 폐지되었다.

굴동에서는 4․3사건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이곳에서 제를 지내었으며 하도리에서는 현재 굴동에서만 포제를 지내고 있다.(하도향토지 597~599쪽,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2015년 봄에 답사했을 때에는 '검질이 덤방'하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하였다.
《작성 080218, 보완 15070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