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새로 된 냇끼' 신천.. 신천리 돈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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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새로 된 냇끼' 신천.. 신천리 돈지당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8.28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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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부린 선조들인 김동지와 황동지..'이동지', '고동지', '조광문이조사공'까지 모시는 당

신천리 돈지당
 

위치 ; 성산읍 신천리 바닷가 포구 서쪽
유형 ; 민속신앙
시대 ; 조선~현대

 

 


성산읍 신천리와 신풍리, 표선면 하천리는 내(개로천=진순내=천미천)의 끝에 자리잡은 '천미촌'에 해당된다.

내의 위쪽을 '웃냇끼'(上川尾=신풍리), 아래쪽을 '알냇끼'(下川尾=하천리)라 했었다. 천미포왜란 이후 천미포연대 부근에 새로 마을이 이루어져 '새로 된 냇끼'라는 뜻으로 신천리가 되었다.

신천리의 포구는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뒷머흘'이 중심이 되고 있다. 인근 마을에 비하여 늦게 개발되었기 때문에 '새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새개는 '안캐', '중캐', '밖캐'로 축조되어 있다.

이 일대에는 '뒷머흘원'과 '새개미원'이라는 갯담과 '코지부리큰산물'이라는 용천수가 있다.


신천리 돈짓당은 빼어난 보재기였으나 수중고혼이 된 「김동지」와 「황동지」「이동지」「고동지」「조광문이조사공」 등 뱃사공들이 모셔졌는데 선왕(船王)이나 다름없다.

'김동지'와 '황동지'는 과거에 낙방하여 생업이 없으니 배를 만들어 '해천영업'이라도 해 볼 생각에서 '뙤미곶'에서 나무를 베어내어 배를 만들었다.

이들은 하천리 '고첫당' 지경으로 옮겨 정주했고, 어장은 이 지경의 '뒷머흘한장'이었다. 이 때부터 이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김동지는 그만 풍랑을 만나 수중고혼이 되어 버렸다. 후손들은 처음 이곳에 정착하여 배를 부린 선조들인 김동지와 황동지를 모시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동지', '고동지', '조광문이조사공'까지 모시는 당이 되었다.

뱃일에 능숙했던 사공들로 전해지나 분명한 이름과 행적은 알 수 없다. 후손들이 배를 지켜 주는 당으로 인식하고 있다.(제민일보 1993년 12월 21일 '제주의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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