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중산간 마을방비..난산리 밧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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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중산간 마을방비..난산리 밧성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8.30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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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쌓은 성을 '안성'이라 하고 나중에 쌓은 성은 바깥쪽에 있다 하여 '밧성'이라 하였다

난산리 밧성
 

위치 ; 난산리 1003번지 마을 서쪽 감귤선과장 남쪽 밭 서쪽 울타리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

 

 


4·3 당시 난산리는 동동네, 섯동네, 알동네, 중동네, 웃동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약 180호 정도가 살았었다. 중산간 마을이므로 소개명령이 내려졌었지만 곧바로 철회되어 마을이 전소되는 화는 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중산간마을과 마찬가지로 서청 등의 응원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청년들을 폭행하고 죽이면서 젊은 사람들이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들을 따라 가족이 모두 산간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

또 남은 사람들은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성산포 주둔 서청 특별중대에 의해 성산포 '터진목'에 끌려가 희생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4·3사건 동안 희생된 난산리 주민은 대략 100명 정도라고 한다.(제주4·3유적Ⅱ 429쪽) 난산리에서 희생이 많았던 것은 난산리에 시집온 신풍리 출신 무장대 간부 吳모씨의 고모가 있었기 때문에 오모씨에게 포섭되어 입산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현재 마을에 80대는 거의 없고 70대 남자도 조금밖에 없다고 한다.(2008년 3월 16일 난산리 거주 1934년생 김정삼씨 증언)

1948년 말에서 1949년 초에 걸쳐 성을 쌓아 마을을 방비했으나 마을을 전부 둘러쌓을 만큼의 인력이 부족하여 섯동네(제주4·3유적Ⅱ에서는 웃동네라고 하였음)는 성밖에 두고 집을 불태우고 성안으로 들어와 살도록 하였다.

난산리 축성이 끝난 후에는 충남부대 10여명이 동동네 민가를 본부로 약 2개월 정도 주둔하면서 마을 경비 및 토벌을 펼치기도 하였다. 1년 정도가 지난 후에 섯동네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므로 성을 서쪽으로 늘려 쌓았다고 한다.

먼저 쌓은 성을 '안성'이라 하고 나중에 쌓은 성은 바깥쪽에 있다 하여 '밧성'이라 하였다.(김정삼씨 증언) 1951년에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국민학교가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학교는 1934년 간이학교로 출발하였으며 1941년 정식학교로 승격됐었다. 지금은 학교가 폐교되어 대안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난산리에는 마을 동쪽과 이곳 두 군데에 성담이 남아 있다. 사태가 진정된 후 성담을 허물어 밭담, 산담 등 모두 원래 위치로 옮겨갔기 때문에 다른 곳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밭 경계인 곳만 일부 남은 것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성은 나중에 쌓은 밧성(바깥성)이다. 일부 직선으로 된 곳이 있고 길 가까운 쪽에는 곡선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밭 경계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길이는 100m 정도, 가장 높은 곳이 높이 3.5m 정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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