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견고한 외성..신례1리 물오름(수악)주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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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견고한 외성..신례1리 물오름(수악)주둔소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9.17 0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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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과 외성 구분 뚜렷하고 회곽도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신례1리 물오름(수악)주둔소

 

위치 ;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수악 동쪽 일대
유형 ; 방어유적(성)
시대 ; 대한민국
관련 ; 4·3 사건


 

 

 

위치 및 찾아가는 길 ; 주둔소의 위치는 수악의 동쪽이며 신례천과 하례천의 계곡 사이에 있는 동산에 위치해 있다. 지금의 수악주둔소는 사람들이 찾지 않아 잡목들이 우거져 그 형세를 한꺼번에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은 4·3 당시만 해도 남쪽으로는 신례리, 하례리, 효돈쪽까지, 서쪽으로는 수악의 주변을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으로는 신례리와 하례리, 효돈 쪽까지 깨끗하게 조망할 수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한남리경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수악의 주변과 북쪽으로는 물오름 주변의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었다.


5 16도로 입석동에서 수망으로 이어지는 산록도로로 들어가서 기상대 서쪽 200여m쯤에서 북쪽으로 시멘트길을 따라 마을공동목장 축사를 찾은 후 다시 200m 쯤 더 올라간다.

차를 세운 후 도로의 서쪽 초지를 지나면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건너 서북쪽으로 500m정도 가면 나온다. 숲의 중간중간 나무에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이 표시를 따라가면 비교적 쉽게 갈 수 있다.

축성 시기와 관련된 사람들 ; 수악주둔소는 1949년 가을경에 만들어졌다. 이 수악주둔소가 만들어질 때 작업을 하는 데는 인근의 신례리와 하례리는 물론 서귀포시 상효동 사람들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

주둔소까지 물자를 나르는 지원사업은 대부분 가까운 신례리 사람들이 맡아서 했다. 수용소 대장이 지원명령을 내리면 음식에서 술까지도 바쳐야 했다. 신례리 주민들은 이 당시의 힘든 고통을 회상하며 고개를 흔든다.


"주둔소에 필요한 물자들은 신예리 마을에서 공급했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불이며 식량, 고기 등을 갖다 바쳐야 했고, 구장을 지냈던 동네 어른은 술을 안가져 왔다고 주둔소 경찰들에게 매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말을 안들으면 곧 죽음이니까요."(2008년 79세 신례리 양성춘)


성을 쌓고 나서는 경찰토벌대의 지휘 아래 토벌을 다녔는데, 인근의 마을 주민을 동원해 이 주둔소에 집결하고는 조를 나누어 토벌을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경찰토벌대였던 '100사령부'(사령관 한재길)가 주둔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무장대 등을 토벌하기 위한‘현장사령부’역할을 했다.

성의 규모와 구조 ; 주둔소는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해서 쌓았는데 내성과 외성 사이는 거리는 대략 4m 가량이며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고 외성은 회곽을 이루고 있다. 외성의 바깥쪽 높이는 3.5m 정도였으며, 내벽은 2m 가량 되었다.

외성은 지금도 견고하다. 외벽에는 5m 정도 간격으로 총안(銃眼)이 나 있다. 내성은 1.5m 정도로 높이 2m 정도의 '회곽도'가 있으며 성터 규모는 동서 방면으로 45m, 남북 방면으로 30m 정도다. 출입구 정문을 비롯하여 건물터, 난방을 했던 아궁이터, 화장실터도 남아 있다.

주둔소의 내부 면적은 대략 250평 정도이다. 주둔소의 정문 앞쪽에는 높이 6m 정도의 숙이낭(삼나무)을 박아서, 나무 꼭대기에 주둔소 표시를 하는 하얀 깃발을 달았다고 한다.

또 토벌대가 토벌과정에서 사로잡은 유격대의 머리를 잘라와서 그 나무 꼭대기에 걸었다가 며칠 후에 그 머리를 나무 밑에 묻었다고 한다. 한 증언자는 지금 그 밑을 파 보면 머리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보존 상태 ; 수악주둔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없었던 까닭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 형태가 남아 있다. 축성 당시 돌 중 일부는 이후 내성 안에 있는 묘지를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했지만 외성과 내성의 전체적인 둘레는 물론이고, 외성의 회곽과 높이 등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외성에서 내성으로 들어오는 '올렛목'과 내성에서 건물로 들어오는 길목의 흔적들도 밑돌로나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내성과 외성 구분이 뚜렷하고 회곽도까지 남아있는 경우는 사실상 처음이라고 한다.(제민일보 2005년 1월 2일, http://www.jeju43.org/, 한라일보 2008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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